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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4 [18' 태국 쪽캠] 피스캠프 역사 세미나 : 일제강점기 201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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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크입니다.

지난 소식에서 예고한 대로, 이번 주 피스캠프에서는 역사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세미나란 각자 공부한 내용을 공유하고 또 생각해보는 자리인데요.

이번 역사 세미나의 주제는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세미나 전날,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친구들의 모습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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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가 적은 맥스의 스피치!

시험 삼아 글을 읽는 소리가 거실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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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가볼까요?

컴퓨터가 있는 2층은 조용하지만 뜨거운 열기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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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잘 되어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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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은 거의 컴퓨터 속으로 빨려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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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역시 매일 밤 거실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자신이 맡은 주제를 열심히 준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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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나 당일>

 

일제강점기는 지금도 현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밖에 되지 않은 가까운 역사지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약 35년 동안의 시간과, 일제강점기 전의 상황까지 포함해

우리는 총 일곱 개의 주제를 나눠가졌습니다.

 

먼저 주제를 맡은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 전 3분 동안

자기 주제에 대해 공부한 내용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발표가 끝나면 각자가 궁금한 점을 묻는 시간을 가지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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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표자는 맥스!

첫 번째 순서의 주제를 맡았어요.

 

 

테디

"맥스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맥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일어난 일을 맡고 있습니다."

 

테디

"네. 그러면, 맥스가 친구들에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무엇인지 소개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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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 맥스

 

 

안녕하세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주제를 맡은 맥스입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와 그에 대한 조선에 피해와 노력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청은 1882년 임오군란을 구실로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크게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을 두고 청과 일본이 경쟁하던 1894년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일어나서 외세를 몰아내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자고 궐기한 것이 동학농민운동입니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제압하려고 청에 군대를 요청했습니다. 청이 군대를 보내자 일본 또한 군대를 파병하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파병으로 놀란 조선은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는 조약 전주화약을 맺어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청일 양군이 동시에 철군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철수요청을 거부하고 내정개혁을 핑계로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후 선전포고도 없이 청을 공격해서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일본군은 선제공격을 해서 승기를 잡은 후 조선에 내정 간섭을 심화했습니다.

이에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려고 다시 농민군을 집합시켜 일본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일본의 최첨단 무기에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청일전쟁은 청일 양군의 전쟁이었으며 한반도 내에서는 일본과 농민군들의 전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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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러일전쟁은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고 뤼순항을 조차하며 만주에서 입지를 강화해갔습니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러시아가 의화단 운동을 빌미로 파견한 군대를 일부 철수시키지 않고 압록강 주위에 주둔시켰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던 일본뿐만 아니라 영국에게도 자극이 되었습니다.

이에 영국과 일본은 제 1차 영일동맹을 맺었습니다.

영국은 일본을 지지하였고 러시아가 압록강 입구에 조차하자 미국도 일본을 지지하였고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후원을 얻게 된 일본은 1905년 뤼순을 함락시키고 동해에서 러시아에 발틱함대를 격파했습니다.

그 결과 1905년 9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며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았습니다.

러일전쟁은 양국의 국내 상황도 변화시켰습니다.

일본은 전쟁 승리로 전쟁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러시아는 전쟁으로 생활이 빈곤해진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러시아의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또 러시아는 동아시아로 세력확장이 막혀 중앙아시아와 발칸 반도로 침략방향을 옮기면서 세계 1차 대전의 불씨를 촉진시켰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공부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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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가 끝나자 친구들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러시아가 한반도를 노렸던 이유는 뭔가요?

 

맥스

러시아는..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일본이 한반도를 노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맥스

음. 세력을 확장하려고 공격하지 않았을까요?

 

테디

혹시 솔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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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러시아가 한반도를 노린 이유는요. 러시아가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 있는 탄광이나 그런 걸 노리고 그 당시 유럽 쪽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에 있는 자원을 욕심내서 한반도를 매우 욕심내고 있었어요.

 

탄광 때문에?

 

브래드

탄광과 자원 때문에.

 

테디

혹시 솔은 알고 있는 게 있나요?

 

항구 때문에요.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라 해야 하나? 부동항이 따로 없어서..

 

테디

부동항은 항구인데, 얼지 않는 항이죠. 항구가 얼면 겨울에 배가 들어올 수 없잖아요. 그런데 러시아는 너무 추우니까 겨울에 얼지 않는 바다가 없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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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러시아가 일본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들이 참 많았는데요. 그중 ‘피의 일요일’ 사건은 어떤 사건인가요?

 

맥스

피의 일요일? 그건 모르겠어요.

 

브래드

그렇다면 청나라와 일본군이 왜 한반도에 모여서 싸운 건가요?

 

맥스

왜 한반도에 모여서 싸웠냐고요?

 

브래드

네.

 

맥스

그건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한 그때 농민군들이 와서 외세를 몰아내자고 동학농민운동을 시작해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는데 그때 일본도 군대를 같이 파병한 거예요. 그래서 조선은 다시 농민군이랑 전주화약을 맺고 양국 모두 군대가 돌아갈 것을 요청했는데 청나라는 돌아갔고 일본은 거부하고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뒤 청나라를 공격해서.. 그래서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벌여졌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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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왜 영국은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었나요?

 

맥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압록강 주변에 있는 러시아를 몰아내려고 서로 동맹을 맺었습니다.

 

브래드

당시 유럽이 세계 대전 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요. 그때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고요. 러시아가 뤼순항 쪽으로 점점 세력을 넓히려고 하자 러시아가 커지는 걸 싫어하는 영국이 그걸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겠다는 확신이 드니까 2차로 영일 동맹을 다시 맺었어요.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는데.. 그럼에도 일본을 지원한 이유는 단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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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견제하기 위함만은 아니고.. 전쟁이 시작될 무렵부터 본다면 무모한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전쟁이 끝나고 보면 일본이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훨씬 지원을 많이 해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또 이 와중에 영국은 그렇게 멀리까지 파병할 수 있던 상황은 도저히 안 됐기 때문에, 당시 동양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일본에게 지원함을 통해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준 거죠.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를 보던 시각은 만주를 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첫 시작점으로 봤지만,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그저 작은 땅덩어리에 불과했기에 전쟁에 임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았을까, 그래서 일본이 영국의 지원을 업고 이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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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요

일본은 소유하고 있던 랴오둥 반도를 왜 다시 청나라에게 돌려준 건가요?

 

맥스

잘 모르겠습니다.

 

테디

쿠요는 이유를 알고 있나요?

 

쿠요

저도 모르겠어요.

 

오보

조용히 해라, 하는 식으로 줬던 것 같은데요. 먹고 떨어져라, 하는 식으로 줬던 것으로 기억해요.

 

테디

그게 언제입니까?

 

오보

모르겠어요.

 

 

쿠요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맥스

그 이유는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후에 선전포고도 없이 청을 공격해서 청이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맞서 싸우다 보니까 청이 패배하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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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멋지게 첫 시작을 열어준 맥스! 고맙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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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을사조약과 친일파 / 솔

 

 

안녕하세요, 이번 일제강점기세미나에서 을사조약과 친일파, 을사오적 주제를 맡은 솔 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일본은 이제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대한 제국을 주무를 수 있게 됩니다. 일본은 대한 제국의 주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세계사회에 알리기 시작했고, 러일전쟁 도 중 서강열강으로부터 조선이 일본아래에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은 아직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관계였습니다. 심지어 조선이 대한 제국이되면서 일본과 같은 제국의 위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겉보기에만 그랬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완벽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 명분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주겠다는 것.  고종은 일본의 숨겨진 의도를 알고 거절했지만, 일본은 무장군대를 보내 서울 시내를 점령하고 궁성주변에는 헌병과 경찰을 배치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그렇지만 고종과 내각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초초해진 일본은 직접 궁중에 들어가 어진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런 압박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당시 일본대표로 대한 제국에 와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각부 대신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한규설, 민영기는 반대, 이하영은 소극적 반대,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 찬성하며 을사조약은 통과되었습니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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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을사조약에 찬성한 5인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릅니다.이 5명(을사오적)은 권력과 지위, 부를 한번에 가졌습니다. 그 중 이완용은 조선인들 가운데 왕을 제외하고 가장 부자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부유하게 살았으며 사후에도 일본황실로 부터 대 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 을사조약이 체결된 결과에는 을사오적도 한 건 했지만 고종역시 공범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군대를 무장시켜 대한 제국에게 압력을 가할 때 고종이 겁을 먹어 조약체결을 나 몰라라 했다는 것입니다.당시 신문들은 상소만을 믿고 을사오적에게만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 당시 유림들의 말로는, 고종은 을사 늑약을 체결할려고 했으나, 내각에게 책임을 넘겼으며 ‘협의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종에게 책임이 가장 크다, 을사오적보다 더 무책임한 매국노다 라고비판하는 역사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을사오적 외에도 많은 친일파가 있습니다.2002년 민족 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표된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이 있습니다. 현재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들이 현재까지도 한국에서 부와 권력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여정부시절 친일의 대가로 받은 재산을 국고로 환원했지만 제 3자에게 팔아 치운 토지나 현금화한 재산, 귀중품은 제외됐고, 친일파로 부터 회수한 재산을 극히 일부입니다. 한일병합조약에 협조해 자작작위를 받은 민병석의 가족은 전 대법원장입니다. 이 대법원장은 유신정권으로 부터 최고 국민훈장인 무궁화 장을 국가로 부터 받았습니다. 그외 민병석의 가족들도 기업인, 검사, 변호사 출신입니다. 친일파 이대로 괜잖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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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요

친일파와 지일파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모르겠는데요. 지일파가 뭔가요?

 

쿠요

저도 몰라서 물어봤어요.

그렇게 1910년 부터 1909년 까지 통치를 이어오다가, 1919년 3월 1일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강압적인 통치에 한계를 느끼고, 헌병 경찰이 보통 경찰로 내려가고

'조선에서 문화의 발달과 민력에 충실' 한다는 구호 아래 '문화 정치'를 실시하며

조선인들의 의지와 자율성을 존중 한다고 했지만 경찰의 수를 더 늘리고,

친일파를 내세웠다. '헌병 경찰 통치기'는 막을 내렸지만 통치 방식은 더욱 교묘해지면서 계속 이어갔다.

 

테디

다음 질문 해주세요.

 

쿠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이들을 왜 을사오적이라고 부르나요?

 

을사조약에 찬성한 5인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릅니다. 을사조약에 찬성한 뒤 권력과 지위, 부를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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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고종과 모임에서 함께 대화하고 일본 군대와 헌병경찰을 배치했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질문이 정확히 뭐죠?

 

맥스

고종과 함께 모임에서 을사조약을 맺은 사람..

질문을 간단하게 하면, 을사보호조약을 맺을 때 고종을 겁먹게 해서 달아나게 했던 일본의 정치인 이름이 궁금해요.

 

아까 3분 스피치에서 이야기했는데요.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직접 하진 않았겠고 이토의 부하가 했겠지요.

그렇지만 당시 대한제국에 대한 감시, 감찰을 하고 있던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맥스

음, 저도 책에서 본 건데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초성이 이응, 히읗이었던 것 같은데..

 

테디

혹시 그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 아닌가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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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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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는 당장 책을 펴서 자기가 궁금한 이름을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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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친일파는 무슨 일을 했나요?

 

대표적인 친일파 이완용 씨를 예로 들자면, 대한제국의 높은 자리에 위치해서 대한제국의 실익은 생각하지 않고 일본에게 좋은 정책, 유리한 정책을 많이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방해했죠.

 

레몬

이건 솔의 생각을 묻는 건데, 을사조약은 조약이라 생각하나요, 아니면 늑약이라고 생각하나요?

 

제가 찾아본 바로는 조약이라는 게, 그 단어의 뜻은 특정 국가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가치 중립적인 용어래요. 그래서 현재 국사 편찬에 의하면 조약이라는 표기를 채택해서 쓰고 있는데, 을사늑약 또한 허용한다는 입장이고, 그리고 늑약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가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반영하기에 학술적으로 사용하기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조약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늑약인데, 국제적인 정서에서 보면 조약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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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을사조약은 한국 입장에서도 불리한 조약인데도 왜 체결됐나요?

 

저는 여기서 고종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시 대한제국이 약했던 것도 있고 일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부분도 분명 있었겠지만, 만약 고종이 끝까지 반대를 했다면 어찌 되었건 을사조약을 맺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을사조약이 불평등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체결된 이유는 그 나라의 군주가 책임감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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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듣다 보니 궁금해졌는데, 을사오적이나 친일파들이 분명 죄를 짓고 떵떵거리면서 살아 왔잖아요. 그런데 왜 친일파들은 벌을 받지 않았고, 어떻게 잘 살 수 있었나요?

 

독립 이후에도 친일파들은 세력을 잡고 있었고,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요. 독립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자기의 재산을 털어서 운동에 보탠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렇지만 친일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친일파들이 부와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 해방이 되었고, 해방 후에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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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네. 이제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솔 수고했어요.

 

일동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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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을사조약이 결국 우리나라로부터 무엇을 빼앗은 것이죠?

 

외교권.

 

테디

그러면 외교권을 빼앗았다는 것은 외국과의 외교 관계를 우리가 직접 맺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대신 맺어준다는 거죠? 또 무엇이 있습니까?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테디

우리나라는 정상적인 한 나라가 아니라 일본의 밑에 있는 숙명, 속국이 된 거죠. 그러니까 지금으로 생각하면 대한민국 대사관이 태국에 있죠? 근데 그게 다 없어지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이제 외교권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태국에서 일본 대사관을 가야 돼요. 그렇게 된 거예요, 말하자면.

 

맥스

일본까지 가야 돼요?

 

일동

(웃음)

 

테디

아니아니, 태국에 있는 일본 대사관으로 가야 돼요. 우리나라는 외교권이 없으니까.

뭐, 요즘 유행하는 한미FTA 이런 거 있잖아요. 이런 나라간의 관계도 일본이 대신 맺어준다. 이런 게 바로 을사조약의 내용이었어요. 여기까지 다들 이해했나요?

 

그럼 여기서부터 어떻게 상황이 더 진행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시몬?

 

시몬

네.

 

테디

우리나라에서는 경술국치라고 많이 불리는데요. 한일합방, 또는 한일병합 혹은 한일합병이라 부르는 합병 사건. 그리고 헌병경찰통치기, 1910년부터 1919년 동안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치했던 시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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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로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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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볼펜 박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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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일합병과 헌병 경찰 통치기 /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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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은 1910년 8월 22일 또는 8월 29일에 체결 된 조약이다. 일본이 한국의 국호마저

박탈하려는 것이 목적이였다. 조선 통감부의 통감이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

에게 죽임을 당하자 통감의 자리가 비었었는데, 그 통감 자리를 문관 출신,이토의 후임이자

육군 대신인 '데라우치'가 새 통감 자리를 채우자, 조선인들은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그 걱정대로 데라우치는 1909년 가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토벌작전' 으로 한반도 내의 

의병운동. 즉, 동학농민운동 등의 의병운동을 완전히 진압해버렸다. 

 

데라우치는 토벌작전 이후에 당시 조선 측 파트너였던 을사오적 인물 중 하나인 '이완용'과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한 작전을 펼쳤는데, 그게 바로 1910년 8월 22일에 체결 된'합병조약' 이다. 사실 1909년 7월, 이미 일본 내에선 확정된 상태였고, 8월 18일, 각의에서 합의를 보게 한 다음, 22일 순종에게 형식 만의 어전 회의를 거치게 하며 1주일간 비밀로 부쳐졌다가 8월 29일, 이완용이 윤덕영을 시켜 황제의 어새를 날인하여 사람들에게 합병조약을

공개적으로 반포 하면서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조선 정부는 즉각 해체되고, 통감부는 총독부로 승격했다.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반도 곳곳에 헌병 경찰을 두고

다스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헌병 경찰 통치기'가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통치 방식의 이유는 한반도 전체에 공포 분위기를 조정하여 조선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게 하기 위해서였다. 통치 이후 일본은 민족 운동 단체를 탄압 하고, 민족 운동가들을

잡아 들이며 조선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았다. 또, 학교에서 모든 교사들은 칼을 차고

수업을 진행하였고, 조선 태형령을 시행했다. 조선 태형령이란 조선인들이 죄를 지었을때

조선인에게만 행해지는 비인간적인 벌이다. 태형은 곤장을 의미한다.

 

헌병 경찰 통치 중인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의 준공식에 참여하기 위해

신의주에 온 데라우치를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이 암살 시도를 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데라우치는 그 보복으로 안창호와 신채호가 이끄는 신민회를 타깃으로 삼아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였는데, 당시 105명이 검거되어 그것을 '105인 사건' 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1911년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게 1910년 부터 1909년 까지 통치를 이어오다가, 1919년 3월 1일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강압적인 통치에 한계를 느끼고, 헌병 경찰이 보통 경찰로 내려가고

'조선에서 문화의 발달과 민력에 충실' 한다는 구호 아래 '문화 정치'를 실시하며

조선인들의 의지와 자율성을 존중 한다고 했지만 경찰의 수를 더 늘리고,

친일파를 내세웠다. '헌병 경찰 통치기'는 막을 내렸지만 통치 방식은 더욱 교묘해지면서 계속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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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요

당시 회사령이라는 게 내려졌는데요. 이 회사령이 조선인에게만 내려진 것인가요? 아니면 일본인도 포함하는 법령이었나요?

 

테디

그 전에 회사령이라는 게 무엇인지 설명을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쿠요

분명 봤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요.

 

테디

본인도 회사령이 뭔지 모르고 질문을 하게 된 건가요? 그런 상황이네요.(웃음) 혹시 회사령이 뭔지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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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

회사를 세울 때 일본에게 문서나 자료를 제출하고 거기에 대해 허가를 받아야만 공식적인 회사가 될 수 있다는 법령이에요.

 

테디

그게 새롭게 시행된 정책인가요?

 

오보

새롭게 시행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이 시기의 회사령은 허락을 구하는 대상이 한국 기존의 정부가 아니라 일본 정부였기 맡아야 했기 때문에 한국에게 도움이 되는 회사는 설립할 수 없었어요.

 

테디

쿠요의 질문이 뭐였죠?

 

쿠요

회사령이 조선인에게만 해당되는 법령이었는지, 아니면 일본인도 포함하는 법령이었는지요.

 

테디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질문을 넘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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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일본은 왜 병합을 서둘렀나요?

 

시몬

음..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테디

일본이 왜 병합을 서둘렀다고 생각해요?

 

시몬

저는 일본이 병합을 서둘렀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테디

그러면 레몬은 일본이 병합을 서둘렀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요?

 

레몬

일본이 조선을 더 빨리 지배하려고 병합을 서둘렀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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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을 체결한 후와 한일병합을 체결한 후의 모습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테디

을사조약이 1905년이고 한일병합이 1910년인데, 한일병합의 전고 후가 어떻게 달랐는가? 라고도 물어볼 수 있겠네요.

 

그렇죠.

 

테디

그러면 어떻게 달랐습니까?

 

시몬

한일합병조약의 경우는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것이 된다는 조약인데요. 그래서 그 전에는 일본이 조선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었어요. 그런데 한일합병 이후에는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죠.

헌병경찰을 곳곳에 배치하고, 자유와 권리를 탄압하고, 언론의 경우도 신문을 내기 전에 검사를 받아야 하는 등 많은 탄압이 생겨났죠.

 

혹시 일본 내에서 한일병합을 비판하던 목소리도 있었나요?

 

시몬

잘 모르겠습니다.

 

테디

솔은 혹시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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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헌병경찰이 무엇인가요? 경찰과 헌병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시몬

음..

 

블루이

경찰은 민법과 형법을 집행하고요. 헌병은 군법을 집행합니다. 군인이 잘못을 하면 헌병에게 끌려가고, 우리가 잘못을 하면 경찰이 잡으러 오죠.

 

테디

그럼 이 시기에는 모든 국민이 잘못을 하면 헌병에게 끌려갔던 시기라는 말이 되는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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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요

대한제국이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테디

한일합병 이전에 해산이 되었던 것 같은데, 언제 해산이 됐죠?

 

쿠요

그래요? 잘 모르겠네요.

 

시몬

제가 알기로는 대한제국의 군대는 한일합병 전에 해체되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그 후에 해체된 걸로 알고 있고요.

 

테디

시기가 언제였든 간에, 쿠요는 왜 일본이 군대를 해체했다고 생각합니까?

 

쿠요

군사력을 없애려고요.

 

테디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왜 군사력을 없애려고 했을까요? 사실 쿠요의 질문이 그거였거든요. 왜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없애려고 했느냐. 그 질문에 쿠요가 한번 대답을 해본다면요?

 

쿠요

반란이 일어나는 걸 두려워해서? 조선 군대가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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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자, 지금까지 나왔던 내용은 다 이해하고 있나요? 을사조약을 지나서, 대한제국 군대가 해체되고, 한일병합이 있었어요. 헌병경찰이 대한제국을 통치했고요.

그러던 도중, 식민지 조선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어요. 브래드, 브래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브래드

제 주제는 3.1운동과 독립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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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1운동과 독립운동 / 브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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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3.1운동과 여러 독립운동을 알아보기 전에 세계사부터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났어요. 전쟁이 끝난 뒤, 30여개의 전승국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서 파리 강화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곳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14개조 제창한 평화원칙 중 하나인 민족자결주의를 알아보겠습니다. 

민족자결주의란 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원칙입니다. 근대화를 명목으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를 만드는 제국주의와는 다른 주장이죠. 우리나라의 독립단체 대부분이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습니다. 

맥스가 말한 러일전쟁으로 돌아가볼까요? 당시 러시아와 영국은 사이가 나빴어요. 러시아가 뤼순항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 때 영국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영국은 일본과 1차 영일동맹을 맺게 되고 러일전쟁에 미국도 끌여들여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제 2차 영일동맹을 맺습니다. 그 때부터 영국, 프랑스, 미국과 같은 전승국 계열에 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민족자결주의가 적용될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차르가 다스리던 제정이 무너지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됩니다. 피의 일요일은 러시아의 패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요. 차르 제정이 무능했고 폭력적인 대응을 해서 피의 일요일에 많은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그 과정에서 레닌이 혁명을 일으킵니다. 차르 제정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등장합니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공산화를 목적으로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을 1919년 결성합니다. 그리고 강대국에게 억압받던 약소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어요. 

이런 배경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조금씩 시작됩니다. 3.1운동 직후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내는 파리장서사건과 1918년 만주 길림에서 안창호, 박은식, 이상용 등 39인이 발표한 무오독립선언 그리고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유학생 400여명이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등 국내의 독립의 불씨를 지핀 뜨거운 사건들이 해외에서 벌어졌습니다. 


3.1 운동. 우리나라의 종교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거대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19년 1월 22일에 갑작스런 고종의 죽음으로 독살설이 퍼지고 국민들의 분노도 들끓었습니다. 일제의 무장통치의 감시를 그나마 덜 받던 종교계와 교육계에서 1919년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의 인산일(장례식)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있을 당시에 만세 운동을 준비합니다. 3월 3일을 피하자는 의견이 나와서 3월 1일로 결정되었습니다. 

3월 1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계획이었던 손병희, 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해 태화관이라는 요리집에 모였습니다. 독립선언을 하기 전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식을 갖겠다고 연락한 뒤, 오후 2시 한용운의 독립선언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세삼창 후 대기중이던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민족대표의 역할도 끝났습니다. 

같은 시간,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대표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합니다. 2만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로 나아갔고 인산일을 위해 올라온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이후 3.1운동은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서 시골과 외국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일본은 폭력적인 저지에 나섰고 그에 분노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경찰서와 관공서 등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고 일본인을 처단하는 등 폭력투쟁도 이어나갔습니다. 

3.1운동은 5월 30일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피해도 상당합니다. 일제에 검거된 사람이 약 46,000명 피살된 사람 7,500여면, 부상자 16,000여명. 49개의 교회와 학교, 715호에 달하는 민가가 불탔습니다. 일제는 잔인한 학살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경기도 화성 제암리 주민 중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아 교회 안에 가두고 무차별 사격을 가한 뒤 불을 붙였습니다. 이날 총 30명을 학살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많은 희생을 치른 3.1운동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이 있습니다. 실패했다는 관점은 3.1운동은 민족의 에너지를 분출했지만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꼽습니다. 평화시위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호소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했지만, 민족자결주의가 빛을 발하지 못하여 세계여론이 한국을 동조하고 일본을 비난했지만 독립의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성공했다는 관점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계기, 10년의 무정부상태를 극복하고 훗날 민주공화제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큰 도움을 줍니다. 3.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가 사라지고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됩니다. 복벽주의란 왕을 다시 옹립하자는 의견입니다. 

3.1운동은 훗날 여러 독립운동의 씨앗이 됩니다. 3.1운동의 여파가 잠잠해진 1919년 9월 서울역 기차에서 내린 새 조선총독이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어딘가에서 폭탄이 날아옵니다.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65세인 강우규 의사가 던진 폭탄에 총독은 가벼운 부상을 입은 정도였지만, 한국이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1920년대에 일어난 6.10 만세운동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순종의 인산일로 인해 시작됩니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승하하자 두 번째 3.1운동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한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총동원해 경비를 매우 삼엄하게 했습니다.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천도교계 노동단체, 학생운동단체들이 연대하여 거대한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감지한 일제는 무려 1만 명의 애국지사를 사전에 검거하여 투옥하였고 시위계획은 예정대로 주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일부단체가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 일제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만세운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일제의 사전 검거로 3.1운동처럼 거대한 민족으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민족운동의 거름이 됩니다. 

이후 여러 거사가 이어집니다. 1920년 의열단이 6차례에 걸쳐 식민통치 시설에 폭탄을 던집니다.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는 1930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왕이 타고있던 마차에 투탄하였지만 실패한 거사도 있었습니다. 같은 해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일을 맞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경축을 개최합니다. 기념식장의 단상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장성과 고위관리를 처단하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강력하게 진행됩니다. 1920년대 독립군과 일본군의 교전수는 한 해 동안 1600회로 독립운동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독립 이전까지 독립운동을 이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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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될 정도로 긴 분량의 스피치가 인상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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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자, 질문을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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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3.1운동으로 인해 이득이 되었던 점과 불이득이 된 점은 무엇입니까?

 

브래드

불이익이 되었던 점은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한 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아까 전에 말했듯이 검거된 사람들이 약 사만 육천 명, 피살된 사람 칠천 오백 명, 부상자 만육천 명 그리고 많은 건물이 불에 타는 등, 그리고 고문 등 우리 민족이 피해가 많았습니다. 인명 피해가 많어요.

그리고 득이 되었던 점은요.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드는 데에 기반이 되기도 했고요. 그 다음부터의 독립운동들의 수준을 높여주는? 3.1운동에서 조직적으로 하지 못했던 그런 운동들을 훗날 더 조직적이고 확실하게 했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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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3.1운동이 왜 비폭력적으로 진행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브래드

어.. 일단은요. 비폭력을 생각하고 한 운동이었지만 폭력이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워낙 많았고, 당시 일본의 거친 대응으로 인해서 폭력적인 시위로 거듭나기도 했고요. 3.1운동이 5월 30일까지 이어지는 동안 시골이나 작은 도시에서는 약간은 폭력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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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요

많은 사람들이 3.1운동의 실패를 예상했다는데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브래드

잘은 모르겠지만 예상할 순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당시 일본은 폭력적으로 대응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민족 자체가 그런 폭력적인 행동에 대해서 잘 대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독립운동 한번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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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후대 독립운동의 롤모델이 된 이유는 뭡니까?

 

브래드

우선 규모부터 차이가 있었는데요.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 명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때 탑골공원과 그 주변 시내에서 약 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엄청나게 거대했던 시위였죠.

그리고 한반도 전역에 고루 이 3.1운동이 퍼지다 보니까 어떻게 보면 제일 유명하다 할 수도 있고, 심지어 통치 방식을 바꿀 정도로 일제에 타격을 주었고, 이후 3.1운동에 기반을 둔 독립단체도 생겨나는 등 여러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 독립운동의 롤모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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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명의 민족대표 중에서 잡혀간 사람은 없었나요?

 

브래드

네. 투옥되었습니다.

 

투옥되었다가 다시 나가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있었나요?

 

브래드

그게, 여기서 기록된 바로는. 그 사람들은 투옥되었고 나왔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 중에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들도 있었고요. 대표적인 사람들의 이름만 나왔지 사실대로 말하면 나머지 사람들 중에 1930년 이후에는 일제와 협력하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음.. 그래서 민족대표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죠. 그 정신을 계속 이어나갔던 우리 국민들의 투지 등을 생각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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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

탑골공원에서 읽었던 독립선언문이랑 이전에 읽었던 독립선언문은 내용이 달랐나요?

 

브래드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 같은 선언문일 겁니다.

 

테디

오보는 알고 있나요?

 

오보

같다고만 듣고 있었는데요. 별다른 말을 해주지 않아서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생각을 묻는 건데요. 3.1운동이 성공이라고 보시는지 실패라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브래드

저도 고민을 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3.1운동의 피해가 아무리 컸다지만 훗날 우리나라 민족의 정신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고. 진짜 감동을 받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중국에서도 3.1운동을 따라했었다는 말이 여기 책에 나와 있더라고요.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물론 이 운동을 통해 독립을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성장과 다른 독립운동의 발판이 된 걸 생각해보면 확실히 성공적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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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보는 어떻게 생각하나요?(웃음)

 

오보

그냥.. 사람들이 잡혀가는 등 많은 피해가 발생했지만. 이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보면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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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자, 봅시다. 3.1운동까지 했어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레몬의 스피치를 들어보겠습니다.

 

 

5. 문화통치기, 민족분열통치기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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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일제강점기 세미나에서 일본의 문화통치에 대해 소개할 레몬입니다.

 

우선 첫번째로 3.1운동이 잠잠해지던 1919년 9월 2일에 서울역에서 새로운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기차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가려는 순간 엄청난 폭탄이 터졌습니다.

그 폭탄을 던진 사람은 그해 65세인 강은규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사이토 마코토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 폭탄 사건은 조선인들이 어느 순간이나 저항하고 있다는 경고의 뜻입니다.

그래서 사이토 마코토는 새로운 정책을 내세웁니다. 그 정책은 바로 문화통치! 3.1운동으로 인해 무력만으로는 조선을 지배할 수 없다는 걸 알자 헌병경찰제를 일반경찰제로 바꾸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썼고 1920년에는 조선일보 등.. 신문사에서는 이제 일본말로 신문이 만들어졌습니다.

또 1925년에는 치안유지법이라고 독립운동에 대한 것을 강력하게 탄압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국민학교에는 조선인들의 취학률이 1/6밖에 되지 않아 학교에는 일본인들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미증식계획을 실행하는데요. 산미증식계획은 조선의 쌀 생산량을 늘리고 일본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일본에는 조선의 쌀에 대한 수탈이 많아지고 조선 사람들의 쌀 사용량이 적어졌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1차 대전 때 공업화가 크게 발전되었습니다.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1920년에 자본투자를 하여 식민지를 수탈하고, 조선인들의 성장을 가로막기 위해 회사령을 허가제로 규정했던 것을 폐지합니다. 그리고 폐지 이후 일본이의 자본이 조선에 득이 오니 조선의 자본이 1~2년 사이 10배가 높아졌다. 전체의 비중하는 비율은 10%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세운 기업과 공장이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이 많아졌지만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반을 준다고 합니다.

일본이 우리의 민족 활동에 이간질하는 것이라는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일제강점기의 문화와 통치에 대해 레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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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민족분열통치기의 산미 증식 계획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레몬

조선의 쌀의 생산량을 우선 늘려요. 그걸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이 그걸 가져갔습니다.

 

브래드

산미 증식 계획이 한반도의 쌀 생산량을 늘리기를 실패했다고 배웠는데.. 그렇다면 농민들의 삶은 어땠나요?

 

레몬

쌀 사용량이 줄어들어 밥을 잘 못 먹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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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분열통치기는 문화통치기라고도 불리는데요. 이 통치 방식으로 인해 사라진 전통 문화가 있나요?

 

레몬

잘 모르겠습니다.

 

일제가 언론 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했다고 하던데 그 허용의 기준이 뭔지 궁금합니다.

 

레몬

음..

 

테디

솔은 혹시 알고 있나요?

 

일본을 미화한 기사들만 자주 나갔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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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요

헌병경찰제를 일반경찰제로 바꾼 이유는 뭔가요?

 

테디

사실 이건 레몬이 발표한 스피치에도 있는 내용입니다. 왜 바꿨습니까?

 

오보

좀 더 무력을 쓰지 않게 하기 위해서.

 

테디

그 기폭제가 뭐였죠?

 

오보

3.1운동이요.

 

테디

그렇죠. 3.1운동 때문에 문화통치로 바꾸면서 그것의 일환으로 헌병경찰을 일반경찰로 바꾸었다고 레몬이 발표했어요. 맞나요?

 

레몬

네.

 

테디

그렇습니다. 다음 질문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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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민족분열통치 때 자치 운동, 참정권 운동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 운동이 정확히 무엇을 했던 운동이었나요?

 

레몬

잘 모르겠어요.

 

테디

참이 참여, 정이 정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참정권이라고 부르죠. 혹시 이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나요?

알겠습니다. 

이 시기를 지나서 일본이 또 한번 통치 방식을 바꾸는데요. 민족말살통치기를 맡은 쿠요! 스피치를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6. 민족말살통치기 / 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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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일제강점기 세미나에서 민족말살통치를 맡은 쿠요라고 합니다.

우선, 민족말살 통치는 대공황 이후 일본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인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기 위해 있었던 사건입니다. 조선총독부는 인력이나 군수품 등을 한국으로부터 구했고, 징병제도를 실시해서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시켰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 동원 시켰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내선일체라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와 같은 말을 내걸고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만드려고 했습니다. 당시 내선일체 말고도 일선동조론, 황국신민서사 암송, 창씨개명, 궁성요배, 한국 신문 폐지, 한국어 사용 금지 등이 있었습니다. 일선동조론은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고 강요하면서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황국신민서사 암송은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났습니다. 황국신민서사의 대략적인 내용은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같은 내용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시민들, 심지어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합니다. 창씨개명은 한국인 이름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게 하는 것인데요, 창씨개명이 처음 시행 됐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엔 유명인물을 이용해서 개명을 한 사람들이 10배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을 못하는 것과 같은 불이익이 주어졌습니다. 궁성요배는 일정한 시간이 되면 황궁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조선인들은 일본에 의해 궁성요배를 강요당했습니다. 한국신문 폐지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한국신문을 폐지시켰습니다. 한국어 사용 금지는 말 그대로 한국어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했고, 한반도는 독립을 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이 되고나서도 조선총독부가 바로 철수를 하지 않아서 당분간은 통치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있었던 민족말살통치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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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책에서 읽었는데, 임시정부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오려고 했는데요. 착륙 허가가 나지 않아서 다시 돌아가야 했던 사건이 있었다는데요. 혹시 알고 계시나요?

 

쿠요

음,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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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한 민족말살정책은 어떤 것이 있나요?

 

쿠요

스피치에서도 말했는데요. 간략하게 한번 더 설명하자면요. 황국신민서사 암송, 창씨개명, 한국 신문 폐지, 한국어 사용 금지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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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무슨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그랬는데, 제목이 무엇인가요?

 

쿠요

노래 제목은 모르는데, 그걸 황국신민서사 암송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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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저는 얼마 전에 여기 여자 친구들이 모 인터넷 강의에서 이 내용을 보고 있는 걸 본 것 같은데요. 그게 무엇입니까?

 

기미가요.

 

테디

그게 어떤 노래인데요?

 

천황이 최고다, 천황 만세. 하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테디

지금도 불리고 있는 노래인가요? 지금은 안 불리는 노래인가요?

 

잘 모르겠는데요.

 

테디

그것도 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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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몇몇 인사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압박이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테디

조선인 고위급 간부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제가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네. 한두 명이 아니라 꽤 여럿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쿠요

저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라서요.

 

일본 국민들이 조선의 창씨개명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그건 왜 그런 건가요?

 

쿠요

조선인이 자신들과 비슷한 이름을 쓴다는 게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테디

질문이 더 없다면, 마지막으로 오보의 3분 스피치를 들어보겠습니다.

 

 

7. 일본의 전쟁범죄 / 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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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일제강점기 세미나에서 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전쟁범죄 를 맡은 오보라고 합니다.

 

먼저 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를 말하고. 전쟁범죄는 강제노동, 성노예(우리가 알고 있는 위안부입니다) 학살, 생체실험 등을 말합니다. 전시라 할 지라도 포로의 인권을 지키지 않으면 전쟁범죄로 보면 됩니다. 전쟁에서도 원칙적으로 지켜야 하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전쟁범죄에는 흔히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가 있습니다.

납치, 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모았으며 일본군을 대상으로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았습니다.

대상은 열두살부터 사십세까지, 조선,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일제가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이 다수였습니다.

규모는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고 시설은 약 400개 정도, 피해자는 20만명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여성 한 명에 병사 70명에서 100명을 맡아야 했습니다.

조선에서는 가난한 집안의 여성을 공장 여공으로 알선한다고 속여 데리고 가는 일이 가장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쟁 말기인 1943년에 여자근로정신대 모집때는 위안부가 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결정적으로 1991년 피해자 김학순씨가 위안부임을 밝혔습니다. 1992년 일본 의회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첫 형식적 사과를 했습니다. 현재까지 피해자분들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마루타 부대로도 알려져 있는 731부대입니다.

731부대는 하얼빈 근처에, 당시 천왕인 히로히토의 명 아래, 이시이 시로가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주요 하는 일은 생체 실험이었으며 겉으로는 군 전염병 예방을 위한 연구소로 알려졌습니다. 마루타는 일본어로 통나무라는 뜻입니다. 부대의 생체실험을 당하는 사람을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산 채로 생체 해부를 하거나 성병 연구를 위해 성범죄가 일어났습니다. 이후 군사 재판 때 미국에게 자료를 제공하고 러시아에게 주지 않는 대가로 절반이 사면되었습니다. 나머지는 다시 재판을 받아 6년, 10년 동안의 강제 노동을 했습니다.

 

산다칸 죽음의 행진, 죽음의 바탄 행진도 있는데요. 죽음의 행진이란 전시 상황에 건강을 돌보지 않고 행진, 행군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로 포로나 죄수가 하고 다수의 사망자가 나옵니다. 이것을 일본군이 산다칸 죽음의 행진에서는 연합군 약 천명에게 시켰으며, 행진 중에도 절반 가량이 죽었고 이후에도 400여명이 죽었습니다. 생존자는 6명으로 행진 도중 도망치거나 수용소에서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전쟁이 끝난뒤 일본군 전범 6명이 학살 관련 혐의로 처형되었습니다. 

 

죽음의 바탄 행진도 다를게 없습니다. 7만명의 미군과 필리핀군 88키로를 강제행진하게 하고 수용소에 도착한 사람은 4천명이었습니다.

 

난징 대학살은 기간에 포함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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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 중 그들이 반성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보

제가 그걸 찾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웬만한 전쟁범죄들은 인정을 하지 않고 있어서 찾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전쟁범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전쟁범죄 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혹은, 일본이 스스로 반성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오보

전쟁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재판에 나와서 증언을 할 수는 있겠지만, 피해자가 그것을 이끌어 가기에는 너무나 큰 일이고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스스로 사과를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옳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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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솔의 질문은 개인이 되었건 국가가 되었건, 전쟁의 피해자들 있잖아요. 그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무엇인가, 혹은 그 노력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마냥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이런 거죠?

개인이든 국가든 지금까지 전쟁의 피해자들이 했던 몇 가지 노력이 있거든요. 그 노력이 되었건, 아니면 오보가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이 되었건.. 오보가 솔의 질문에 답변을 다시 해준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오보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위안부에 관련해서 할머니분들이랑 다른 분들, 위안부 피해자를 후원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이 수요일마다 집회를 열고 있거든요. 그런 식으로 집회를 여는 것이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노력인 것 같습니다. 해외의 다른 예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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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일본이 생체실험 같은 전쟁범죄를 저지를 때는 자기들 나라에서 한 거예요, 아니면 전쟁을 한 나라에서 한 거예요?

 

오보

실험이 진행된 장소를 이야기하는 건가요?

 

맥스

네.

 

오보

하얼빈이요. 중국.

 

테디

일본에서 진행된 실험은 없었나요?

 

오보

잘 모르겠어요.

 

테디

제가 알기로는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에서 생체실험을 받다가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거든요.

 

오보

아. 맞다.

 

테디

그러면 일본 국내에서도 생체실험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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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카미카제는 전쟁범죄인가요?

 

카미카제가 뭐죠?

 

오보

말하자면, 자살특공대? 직역하면 ‘신의 바람’이라는 뜻인데, 비행기에 폭탄을 매달고 적진에 날아가 자폭하던 비행부대였습니다.

 

브래드

비행기뿐 아니라 어뢰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잠수함처럼, 폭탄을 실은 어뢰를 조종해서 가는 건데, 처음에는 탈출을 위한 통로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폭탄을 더 싣기 위해 탈출 장치마저 없앴다고 들었어요.

 

테디

그래서 브래드 질문이 뭐였죠?

 

브래드

카미카제가 일본의 전쟁범죄냐는 것이었죠.

 

오보

음..

 

테디

답변하기 좀 애매한 질문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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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요

일본군이 포로들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오보

다양한데요. 재미로 죽일 때도 있었고요. 굳이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포로들을 학살한 경우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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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네. 오보의 주제까지, 이렇게 우리가 일곱 가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우리가 긴 역사를 공부했잖아요. 35년간의 긴 역사를. 사실 이것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려면 시간도 조금 더 필요했겠죠.

우리는 말하자면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전체적으로 한번 훑어본 거예요, 전체적으로. 여기서 좀 더 깊게 들어간다면 또 공부할 거리가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 다들 수고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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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가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세미나를 공부하며 각자가 느낀 점을 간단하게 돌아가면서 이야기합니다.

 

 

브래드

"일단은 조금, 감정으로는, 슬펐던 사건도 있고, 아쉬웠던 사건도 있고, 너무 멋졌던 사건, 독립운동 등을 배우니까 그냥.. 저도 만약 그 시대를 살았다면 저 위인들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 사람들의 뒤에 있더라도 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을까? 가족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고, 목숨을 포기한 사람도 있고, 나라면 정말 저렇게 못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고 저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고요. 그리고 대한민국 민족에 대해서,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있구나, 또는 이렇게 나쁜 사람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쿠요

"저는 이번 세미나 공부를 너무 급하게 한 것 같아요. 자세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게 아쉽고, 그렇긴 하지만 민족말살통치 때 있었던 일들 등 많은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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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괜찮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용이 전체적으로 썩 좋지만은 않아서.. (주제가요?) 네. 그래서 그래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어요."

 

"항상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한 상황과 상황이 맞물려서 다른 하나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게 참 묘하고, 작은 사건이 큰 일을 만들고,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무섭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해요. 그리고 공부를 하면서 아무래도 일제강점기를 주제로 하다 보니까 조금 우울한 분위기의 역사라 해야 하나? 우울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고요. 거기에 대항하는 상황을 볼 때는 대단하다 싶었고요."

 

시몬

"다른 사람들의 스피치 내용이나, 제가 한 주제에 대해서 제가 받았던 질문, 주제들을 너무 몰랐던 것 같아요. 제가 알고 있던 건 정말 기본 지식, 더 넓은 지식이 펼쳐져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래서 놀랐어요."

 

레몬

"책을 좀 더 많이 읽었으면.. 생각이 들어요. (공부하며 느낀 점은요?)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되었어요."

 

맥스

"저는 초반에 공부를 안 하다가 마지막에, 어제와 오늘부터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벼락치기이다 보니까 많이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 같고요. 그리고 공부를 하면서 느낀 건요. 솔직히 책을 막 읽고 하느라고 주제에 대해 느낀 점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막 빨리빨리 하려다 보니까 주제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세미나를 한다면 시작하는 날짜부터 열심히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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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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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현장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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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

우리는 '오늘의 베스트 스피커'와 '베스트 질문자'를 한 명씩 뽑기로 했었죠.

 

물론 특별한 상품이 걸려있다는 소문도 있고요.

뽑는 방식은 비밀리에 진행되는(!) 투표입니다.

 

 

"다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주세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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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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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자가 나왔습니다. 먼저 오늘의 '베스트 스피커'는..

 

"브래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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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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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오늘의 베스트 질문자 역시 발표되었는데..

 

"이것도 브래드?!"

"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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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브래드가 두 개 부문에서 연속 수상하게 되었네요.

축하합니다.

^^

 

테디

"자, 브래드를 시상식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브래드

"아니, 이것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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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우리의 짧은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테디의 말마따나 우리가 오늘 공부한 건 수박 겉핥기 식에 불과한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꽤 많은 내용을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훑어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요.

그리고 어쨌거나 오늘 우리가 가볍게 공부한 내용은 더 깊이 들어갈 거리가 분명히 있는 주제였습니다.

(흠칫, 하는 친구들도 있으려나요? ㅋㅋ)

 

친구들,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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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가 열린 그날 밤,

피스캠프의 대문이 스르륵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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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어디 가세요..??

 

"다 같이 간식 사러 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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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동안 모아둔 돈(청소를 하지 않았을 때마다 내는 벌금.. ㅠㅠ)이 조금 있었기에

오늘 밤 세미나 뒷풀이(?) 겸 간식 파티를 열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에 야간 외출이라 들뜬 친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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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이 모두 브래드를 가리키고 있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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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날은 브래드가 우리와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었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리와 함께하며 그대만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남긴 브래드 씨!

 

당신과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ㅋㅋㅋ

돌아가서도 건강하게 지내고 가끔 연락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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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끝..

이 날 줄 알았으나,

 

피스캠프에 또다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ㅎㅎ

 

 

짜잔!

쪽빛캠프의 새로운 참가자를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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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로

현재 최연소 참가자가 된 수호, '호'입니다.

 

처음 만나보는 풍경 속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신기한지

특유의 에너지를 내뿜으며 잘 적응해가고 있답니다.

 

이제부터는 호의 소식도 함께 전하게 되겠네요.

+_+

 

 

오늘은 여기까지고,

다음 소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피쓰!

(그나저나 호가 소식지 맨 끝에 항상 이 말을 붙이는 이유를 궁금해했답니다. 음..

호! 그 이유를 직접 찾아봐줄래요? 찾아서 나에게도 알려주세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