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 Camp

쪽빛캠프

피스캠프 > 진행중인 캠프 > 쪽빛캠프
2017.11.26 [17' 제주도 쪽캠] 역사란 무엇인가 <피스캠프 조선 왕 세미나, 2편> 2017.12.07

 

 

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 왕 세미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14대 선조, 15대 광해군, 22대 정조, 그리고 26대 고종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긴장감을 더해가는 피스캠프의 역사세미나, 그럼, 시작해볼까요?

 

왕 - 레몬(태조), 테디(태종), 마리모(세종), 벤자민(성종), 솔(선조), 제이크(광해군), 루시(정조), 크롱(고종)

블루이(사회자)

 

() - 일동의 반응

 

 

batch_IMG_1790.jpg

 

 

블루이

어떤 왕입니까?

 

선조입니다. 선조.

 

테디

전하, 전쟁은 아니되옵니다.

 

(하하하)

 

 

먼저, 임진왜란으로 유명한 선조를 용상으로 모시겠습니다.^^

 

14대 선조 / 솔

 

batch_IMG_1794.jpg

 

안녕하세요, 선조입니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과 하동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조선 역사상 서자가 즉위한 첫 번째 사레였습니다.  직위초반에 인순왕후에의한 수렴청정의 영향권 안에 머물렀으나, 7개월 만에 섭정을 거두게 됩니다. 사림 출신 인사들을 대거적으로 등용했습니다. 윤씨 일가를 몰아내고 조정기에 안정을 되찾았으며 영의정 이문경에 의해 사화에 희생된 많은 학자와 신하들을 조정으로 불러왔습니다. 이때 이이, 이황, 이대승, 노수신, 허준, 한석봉 등 세종 못지않게 많은 인물을 배출했습니다. 아무리 인물이 뛰어나도 임금의 선택, 그니까 저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제능력을 펼치지도 못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선조는 역대왕 누 구 못지 않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났습니다.

 

혹시 종계변무를 아십니까? 종계변무는 조선을 '종계'는 종가의 혈통, '변무'는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으로, 명나라의 법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조를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한 문제로 인해 자그마치 2백 년 동안 기록해 줄 것을 주청한 사건으로 조선과 명 사이에 벌어진 외교분쟁입니다. 법전을 수정하기 위해 명나라 사신들에게 매달리고 조른 것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가 즉위 한 틈을 타 주청을 올리자는 방안을 냈고, 이 방법은 성공하였으며, 이 소식이 선조에게  전해졌을 때 성공에 엄청나게 감격을 했다고 합니다. 또 신하들이 이공은 모두 선조의 노력 덕이라 하자 선조는 모두 신하의 노력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천천히 강솔아? ^^)

batch_IMG_2236.jpg

 

조선은 혈통을 굉장히 중시해서 태종과 성종은 서자의 차별을 강화하는 조항을 만들고 구체화시켰으며 경국대전에 담았었습니다. 그런데 서자도 아닌 서손이 왕이 되어 이성계의 혈통을 증명해주니 참 아이러니 한 상황입니다. 종계변무의 성공은 '후궁의 손자라는 선조의 태생적인 콤플렉스를 한방에 날리고도 남는 쾌거'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 종계변무의 성공으로 인하여 신하들을 존호를 올리기를 선조에게 청했으나 선조 스스로는 아주 절절한 태도로 사양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번 종계가 바로 잡힌 것은 조종들이 쌓으신 덕과  경들의 극진한 충성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자신은 이미 임금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존귀하다며 약 1년 동안 연신 거절했습니다.결국 자신이 광국공신들을 책록 한 후 존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는 지금 나라아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이런 존호를 받을 수 없다고 또 다시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다들 임진왜란에 대해 말씀하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제가 그 당시 침략을 믿지 않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는 다릅니다. 선조는 끊임없이 북상의 변과 함께 남방의 왜변에 대해 대비책을 고민했습니다. 전쟁 이틀 전인 3월 26일에도 왜변이 걱정된다며 죄인들 중 무재가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어 왜변에 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한 무명 장군은 절도사 이일로 무고로 파직당했었습니다. 이때 선조가 명을 내려 복직할 수 있었고 하루 만에 8계급 특진을 시켰습니다. 이때 신하들의 반발이 굉장히 심하였다고 하는데 이 무명장군은 바로 '이순신 장군'입니다 또, 명나라에 일본의 침략을 알렸고 군사체계도 바꾸었습니다. 성곽을 수축하고 군사훈련 및 전투를 마쳤습니다. 또 백성들에게 거병을 촉구했고 초유사를 파견했으며 의병부대를 정식 부대로 인정해주었습니다.또 저는 일본의 조총을 보고 스스로 새로운 총을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전쟁 발발 전에도 국방 강화에 힘을 가했으며 관심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짝짝짝)

 

batch_IMG_2253.jpg

 

 

잘 들었습니다. 아직까진 선조는 참 좋은 왕인 것 같군요.

그러면, 이제부터 날카로운 공격 들어갑니다!

 

 

'붕당정치의 시작'

 

batch_IMG_1796.jpg

 

 

벤자민

저 질문 있습니다. 선조는 정계에서 모든 훈구파를 밀어내고, 사림 세력의 말만 수용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림 세력의 의견 대립으로 동인과 서인, 이후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면서 조정이 심하게 불안정해지고 국력도 쇠약해졌습니다. 이를 위해 선조는 중재를 열심히 했지만, 결국 선조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아서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나요?

 

아니오.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조는 그때 사림을 등용한 이유가 그전에 사림들이 사화로 인해서 많이 없는 상태여서 그쪽에 인재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안 선조가 인재를 등용을 한 것이지, 그 결과를 알고 등용한 것은 아닙니다.

 

벤자민

인재를 알고 등용하였지만, 동인과 서인, 동인이 또 남인과 북인으로 자꾸 갈라지면서 끝이 없이 조정의 싸움이 많아졌는데요.

 

그것은 당파의 잘못이지 왜 선조의 잘못입니까?

 

벤자민

그것을 중재하지 못한 선조의 잘못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중재하고 말고는 선조의 책임도 있다고 말하지만, 신하들의 의견이 강하면, 결국에는 (중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벤자민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시는 건가요?

 

아니오

 

(하하하)

 

블루이

어제 밤늦은 시간까지 질문을 준비한 레몬이 질문해주세요.

 

 

'왕의 도망과 체스 전략'

 

 

batch_IMG_1799.jpg

 

 

레몬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망을 간 것과 백성들을 위해서 정치를 했느냐 이 두 가지입니다.

 

도망을 친 것은 어쩔 수 없었어요.

 

(하하하)

 

체스에 비유를 하자면, 왕이 죽지 않는 이상 게임은 안 끝나잖아요? 

 

(오~~)

 

그러니까 어떻게든 왕이 살면 나라를 복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왕이 죽으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당연히 왕을 먼저 피신시키고 자기가 먼저 도망을 간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오오~)

 

레몬

백성들을 위해서 정치를 했다고 하셨는데, 무엇을 했죠?

 

전쟁에서 안 좋은 일이 많기는 했지만, 그전에 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보통 역사책에는 선조가 열심히 안 했다거나 아예 신하들의 말을 듣고 전쟁준비를 무시했다고 했지만, 신하들의 말을 듣고 예전부터 군사훈련을 계속 시켜왔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신들에게 인사이동을 파격적으로 해서 기운을 북돋아 준 적도 있습니다. 이게 백성을 위해 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batch_IMG_1801.jpg

 

 

벤자민

도망친 것에 대해 질문할게요. 도망칠 때에 세자인 광해군이 18살인데도 불구하고, 맞기고 도망치셨나요?

 

믿은 것이죠. 

 

벤자민 

18세 광해군을 믿고요?

 

그만큼 광해군이 대단하다는 증거 아닙니까? 광해군이 그만큼 믿음직스러웠으니까 믿고 맞긴 거죠.

 

벤자민

그 이유 말고는 없습니까?

 

네!

 

테디

조선시대에는 18세도 성인입니다.

 

 

batch_IMG_1803.jpg

 

 

블루이

제가 질문하나 해볼게요. 임진왜란 때 도망간 건 체스에 비유해서 국력을 다시 도모하기 위한 일종의 술책이었다고 말하셨는데, 우리나라 1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도망가면서 다리를 끊어먹었죠. 그것을 국민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블루이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설명을 부탁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다르고요. 

 

(하하하)

 

선조는 그랬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를 위해서 버렸습니다.

 

블루이

그런 견해를 알겠는데, 선조는 국민을 위해서였고, 이승만은 자신을 위해서였다라는 근거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본인이 선조이기 때문에 한참 후에 이승만이 어쨌는지 알 길이 없겠지만, 저는 미래 사람으로써 알기 때문에 여쭤보는 겁니다.

 

우선 선조는 만약에 자기만 살려고 했다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도망을 쳤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애초에 전쟁에 대비를 안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열심히 대비를 했고 무신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돌려줬는데 마지막까지 이르자 자기도 살아야 하고, 나라를 지켜야 하니까 도망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도망친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아는 경우가 없어서 어떤 근거를 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과 광해군'

 

batch_IMG_1809.jpg

 

크롱

백성들에게 정말 잘 대해줬다고 하는데, 저는 서울에서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옮겨갔다고 하는데요.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과정에서 분노한 백성들이 한양의 궁궐에 불을 지르고요. 평양에서 피난길에 올랐지만, 백성들이 격렬하게 막아서서 몇몇의 목을 베어 진정을 시켰다는데, 이 정도로 화를 내게 했다는 것은 정치를 똑바로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고요.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울 도성 밖에는 시체들이 산을 쌓고, 동토는 황폐해지고 굶주림은 극에 달해서 인육을 먹는 풍습도 생겼다고 하는데 백성을 구제하고 민심을 수습하는데 힘을 썼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기본적으로 백성의 입장에서는 분노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왕이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고,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도망을 간 건데, 백성의 입장에선 우선 자기도 살아야 하니까 군주가 도망간 것이 화가 났겠죠. 하지만, 백성들이 막아섰을 떄 왜군이 와요. 그러면 왕도 죽고 백성도 죽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크롱

일본군이 4월에 서울을 떴어요. 선조는 환궁을 미루다가 10월에 환궁을 했다고 합니다. 

 

정서가 불안하니까 조금 진정된 후에 가려고 했던 것 아닐까요?

 

크롱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백성들에게 뭔가를 해준 것 같지도 않은데 왕이니까 일단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에게도 그 일을 맡기고 갔고, 신하들에게도 나라를 지키도록 했어요. 그래서 왜군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선조가 나라를 뜰 때 자기를 지키는 장군과 신하가 최소한의 인력이었다고 합니다.

 

크롱

다 도망갔다고 하던데요?

 

최소한의 인력에서 도망간 것이니까 더 적겠죠. 그 전에는 이미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다 간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닌가요?

 

크롱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은, 요동으로 피란을 가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확실한 것입니까?

 

크롱

확실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batch_IMG_1806.jpg

 

 

확실한 것 같으면 확실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크롱

선조야말로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게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입니까?

 

우선 선조실록에 이렇게 나와있는데, 광해군은 문학에도 총명하고 나랏일도 잘한다고 칭찬이 쓰여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이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넘겨줬다고 적혀있고요. 그 전에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은 것은, 자기가 아끼는 부인이 있는데, 그 부인의 자식(영창대군)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너무 어려서 광해군에게 물려준 것으로 알고 있고요. 광해군을 미워한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크롱

광해군이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고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임진왜란 중에는 그랬고요. 선조는 피란을 갔고, 광해군은 다시 와서 백성과 같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백성들의 민심을 많이 샀는데요. 선조는 자기도 나라를 지켰고 충신도 내려놓고 최소한의 인력만 데리고 간 건데, 광해만 떠받고 자신은 무시받는 상태니까 그래서 광해를 미워하지 않았나.

 

크롱

당연한 거 아닙니까. 본인은 도망을 갔잖아요. 선조가 죽는다 해도 광해군이 있잖아요 광해군이 있으니까, 후대가 있으니까 선조가 죽어도 나라를 지킬 사람은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지금의 왕은 선조니까 당연히 선조가 먼저 피난을 가야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지금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인데, 전쟁이 났어요. 그러면 문재인 대통령 말고 다음 후임자와 국회의원이 먼저 도망을 가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당연히 대통령이 먼저 가야죠.

 

크롱

광해군이 도망을 가라는 게 아니라 왕이 쓸데없이 멀리멀리 떠나야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히 안전의 위험이 있죠.

 

크롱

안전의 문제가 있지만, 광해군이 있잖아요. 후대가 있잖아요. 그러면 선조가 목숨을 조금 더 내어서...

그러니까 나라를 위했다고 하잖아요. 뒤에는 광해가 있어요. 선조는 아무것도 안하고, 광해에게 일을 맞겨요. 도망을 가잖아요.

 

도망은...

 

크롱

제가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batch_IMG_1808.jpg

 

 

크롱

아무튼 그래서 선조가 혼자서 계속 도망을 가잖아요. 그렇다고 평소에 관리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왕이 도망을 가니까 백성들이 분노해서 궁궐도 때려 부수고, 불태우고 행차하는 길도 심지어 막을 정도인데, 이 정도로 일을 안 해놓고 자신은 목숨만 챙기고, 광해군은 일만 하고. 이게 말이 되냐구요. 

 

반론을 하자면, 선조는 광해군을 믿으니까 일을 맡긴 거고요. 생각해보세요. 죽으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세자가 죽으면 나라가 흔들릴 수 있지만, 무너지진 않아요. 왕이 죽으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세자는 군주가 아니잖아요. 자기가 백성들을 돌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광해군에게 그 일을 맡긴 거고요. 백성들이 화났다고 하는데, 아까 답변을 한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블루이

크롱이 혹시 광해군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광해군이 정치를 잘 했는지 못 했는지에 대해서요.

 

크롱

솔직히 애매합니다.

 

블루이

애매하다고요? 어떤 점에서요? 

 

 

batch_IMG_2251.jpg

 

 

크롱

광해군은 연산군과 맞먹을 정도로 폭군이었다는 말이 있는데, 요즘 시대에 재조명을 한다면서 평이 올라간 것 같습니다. 

 

블루이

그런 평 말고 광해군이 한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나요? 그것이 칭송받는 업적이 되었건 엉망진창 사고 친 게 되었건요.

 

크롱

일단 잘못한 것만 적었는데요.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동복형인 임해군을 교살하고, 이복 아우인 영창대군을 살해하며, 민생을 등한시하고 권력다툼을 벌인 이이첨을 중용하고, 궁문 확장공사를 펼쳐서 인조반정의 원인을 만들었고, 친척 문창 대군을 사살하고, 국사를 일으켜 많은 인명을 살생했다고 합니다. 

 

블루이

그런 광해군을 어떤 연유로 믿게 되셨나요?

 

그때만 해도 광해군이 그런 성격을 띠지 않고, 학문적으로 뛰어났고 총명했다고 합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바로는 선조는 광해군을 후임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되어있고요. 생각해보면 광해군이 처음부터 그런 성격을 띄었으면 당연히 왕위를 안 물려주고, 다른 왕자에게 물려줬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 때 안 그랬으니까 물려줬겠죠.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백성에게 잘 못 해준 게 아니냐고 물으셨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왕권도 강했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평안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붕당정치와 정당정치'

 

 

batch_IMG_2232.jpg

 

 

벤자민

선조는 성리학과 유교 사상을 따르고 믿으면서 유교 사상에서는 절대 금기 사항인 붕당정치를 기반으로 당쟁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이게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변화를 꾀하는 거죠. 항상 같은 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벤자민

유교 사상을 조장하면서 붕당정치를 한 게 새롭다고 할 순 있지만, 이로 인해서 잘못되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까?

 

한 번의 시도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 해보는 건 중요합니다. 한 번 해보고 안 되면 그 후에 안 하는 게 중요하지요.

 

벤자민

하지만 시도를 해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또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면서 조정이 악화되는 것을 보면서도 중간에 멈추지 않고, 계속 이렇게 되었는데요.

 

임진왜란 후라서 신하들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전쟁 후 수습을 하는 데에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책임이 있지 않나 싶어요.

 

테디

붕당정치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벤자민

붕당정치는 당이 두 개로 나뉘어서 그들이 싸우면서 정치하는 것을 붕당정치라고 합니다.

 

블루이

저도 벤자민에게 질문해볼게요. 선조와 무관하게, 자유한국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우리나라는 붕당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이야기였죠?

 

벤자민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조선시대에는 성리학과 유교 사상을 따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붕당정치를 시작했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블루이

어떤 것이 문제죠?

 

벤자민

왜냐하면 유교 사상에서는 붕당정치를 하는 것이 금기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블루이

그러면, 유교사상을 따르면서도 유교사상의 문제점인 어떤 부분은 반대해서 붕당정치를 한 게 아닐까요?

 

벤자민

붕당정치를 시작했다는 이유는 될 수 있지만, 붕당정치의 결과가 좋지 않았고요. 이로 인해서 북인과 남인이 나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이것 때문에 왕이 왕권을 주장하기보다, 이들에 이끌리게 되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테디

질문은, 왜 붕당정치가 나쁜 거냐는 거죠.

 

벤자민

왜냐하면 붕당정치가 나쁜 이유요? 일단 붕당정치 하면 조정이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국력이 쇠약해집니다. 

 

블루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서 생각해보자는 취지의 질문인데요. 얼마 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이 됐어요. 붕당정치의 여파죠? 우리나라 국회에 여러 정당이 있고, 그 여러 정당 중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당의 사람들이 더 많았고, 그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판결을 내려서 탄핵되었습니다. 붕당정치의 여파로 왕권이 약화된거죠? 왕을 끌어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가 있는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붕당정치였기 때문에 가능한 우리나라의 위대한 업적이었을까요?

 

 물론 그때 당시의 조정과 지금 이야기하는 국회의 정당정치는 조금 다르긴 해요. 어쨌든 비슷하니까. 그 때는 조정이 나라고, 나라가 조정이었죠. 국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근데 역할은 그렇게 했어요. 국무총리도 있고, 영의정이든 좌의정이든. 정당도 존재했죠. 이야기했듯이 북인, 남인, 동인, 서인. 그런 예로 인해서 왕권이 약화됐어요. 그럼 우리는 붕당정치로 말미암아 대통령을 탄핵한 일이 있었어요.  내가 완벽한 논리는 아닌데, 벤자민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그것을 대립해서 생각해보면, 붕당정치의 문제점이 있으려면 우리나라가 얼마 전에 겪었던 대통령 탄핵조차도 붕당정치로 인해서 왕권이 약화가 된 것이고, 문제가 생긴 거죠. 그것을 바라보는 벤자민의 시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벤자민

일단 예나 지금이나, 붕당정치라고 하면 양쪽이 완전 똑같을 수는 없어요. 지금도 국회를 보면, 더 많은 쪽으로 의견이 쏠리게 돼요. 그러면 의견이 없는 쪽이 좋은 의견이 있어도 자연스레 인원 때문에 묻히게 되는 경우가 생겨요. 선조 때도 적은 세력이 무시되고 그로 인해 왕에서 물러나게 되는...

 

블루이

붕당정치는 적은 세력을 존중하는 방법 중 하나죠. 만약 붕당정치가 없었다면 목소리가 작은 세력이 존재하지도 않는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에 의석이 없는 정당도 존재하지만, 소수의석을 가진 정당도 있죠. 그들이 의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렇듯 목소리가 작은 정치세력이 무시가 된다가 아니고 그들이 존재하고, 목소리를 낸다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벤자민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테디

왕권 약화를 말씀하셨는데, 왕권이 세면 신하들이 다양한 의견을 못 내거든요. 붕당정치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거거든요. 하나의 의견이 나오는 것은 독재고,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은 민주적인 요소가 있는 거잖아요. 오히려 조선 초기에 왕권이 세다가, 조선의 정치가 발전하는 과정은 아니었을까요?

 

벤자민

하지만, 선조는 붕당정치에만 신경 쓰다가 임진왜란 전부터 변방 야인들의 노략질을 못 막았어요. 붕당정치에 신경쓰느라. 그래서 임진왜란 전에도 이런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고, 붕당정치에만 말을 듣고 이이를 믿고 이황을 믿고 하다가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분들이 당의 대표 인물이잖아요. 당의 의견을 수렴한 대표자의 의견을 들었는데, 대표자의 이름이 거론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게 아닌가.

 

블루이

그럼 혹시 솔은 선조가 붕당정치를 통해서 현대 정치 모델인 정당정치, 국회를 통해 다양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제도를 그 시대에 미리 시행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블루이가 말씀하신 거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정여립의 난과 조선 시대의 형벌'

 

블루이

알겠습니다. 또 다른 질문 해주세요.

 

크롱

정여립이라는 관리가 반역을 일으킨 의심을 받아서, 정여립과 관련된 무사들이 대거 끌려와 문초를 받고, 거짓말들로 죄 없는 인물을 고문해서 죽였는데, 여기까지는 이해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역적이잖아요. 역모를 주동했다는 의심이 있으니까. 

 

그런데, 늙은이와 어린이에게 형벌을 가할 수 없다는 게 있었으나, 선조는 멈추지 않고 82세의 노인과 10세의 아들에게도 고문을 해서 사망했고요. 유배된 사람도 고문 휴유증으로 사망했고, 고문치사자가 속출할 정도로 조사과정이 매우 가혹했으며, 이 일로 2년 가까이 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적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오해를 받아서, 죽은 사람도 둘이나 된다고 해요. 

 

 

batch_IMG_2248.jpg

 

 

그것은 난이 많으면 나라가 혼란합니다.

 

크롱

난이 많으면 나라가 혼란한데, 그런데 82세의 노인과 10세 어린 아이에게...

 

잠깐, 잠깐, 말 끊지 마세요. 

 

(하하하)

 

난이 많으면 나라가 혼란해요. 난이 일어났잖아요. 지금은 임진왜란 때문에 나라가 혼란해요.

 

테디

그 전인데요? 

 

(하하하)

 

 

batch_IMG_1791.jpg

 

그 전입니까? 나라에 난이 많으면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난이 한 번 일어나면, 난이 한 번 더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쉽잖아요.

 

테디

이것은 실제로 난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모함에 가까웠습니다. 정여립의 난으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상 모함에 가까웠죠. 

 

어떤 모함이었습니까?

 

테디

실제로 난을 일으키려고 군사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는데, 조정에서 서로의 당파를 공격하기 위해서 한 당파의 누군가가 난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고, 그것이 정여립이었던 것이죠.

 

그것을 고문한 것이 선조였습니까?

 

크롱

예!

 

(하하하)

 

블루이

크롱이 머리를 잘 굴리면서도 치사한(?) 방식으로 질문하고 있는데요.

 

(하하하)

 

80세 노인과 10세 아이를 한 세 번 정도 강조했어요. 우리가 이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사람의 목숨 갚은 그 때와 지금이 달라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숨의 가치는 지금은 소중하다고 느낀다면, 그때는 별로 소중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일단 그것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어야 해요. 어떤 왕이든, 어떤 나라든, 어떤 시대든 공격을 할 때, 순장이 왜 이렇게 잔인하냐? 안 한 곳이 없었어요. 그것 가지고 그 왕이 잔인하다고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테디

크롱의 의견에 대한 보충인데요. 크롱이 82세와 10세를 강조한 이유는, 책에서도 강조했기 때문인데요. 책에서 강조한 이유는 조선 시대 당시에 고문법이 있었어요. 너무 끔찍한 형은 집행하지 않도록 하고, 그리고 특정 고문은 나이 제한을 둬서 나이가 많거나 너무 어린 사람에게 하지 않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그 법을 어겼다는 것이죠. 혹시 알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죽였냐면, 조선 시대 고문 중에 압슬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무릎을 으깨는 고문이에요. 

 

(으아…)

 

어떻게 하냐면, 의자에 앉혀서 무거운 판자를 하나 올리고 사람이 올라타는 거예요. 그게 너무 잔인해서 나중에 영조 때, 법으로 너무 잔인한 고문을 하지 못 하게 했는데요. 어쨌든 선조는 당시에 최고 형태의 고문을 했고, 그것이 너무 잔인하므로 법적으로 나이 제한을 뒀는데, 법을 어기면서 그랬다는 것에 방점을 둬야 할 것 같아요. 

 

블루이

왜 그런 법을 어겨서까지 잔인하게 고문했습니까?

 

크롱에게 묻고 싶은 게, 선조만 어겼습니까? 

 

크롱

선조가 어겼습니다. 

 

블루이

여기 왕들 많은데, 내가 맡은 왕은 그런 법을 어겼다는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있을까요?

 

테디

일단 저 때는 압슬이 없었습니다.

 

블루이

압슬말고 다른 거라도. 

 

테디

다른 건 있었겠지~

 

블루이

그런 법을 어겨서까지도 잔인하게 고문을 하거나 형벌을 내린 사례가 있습니까?

 

테디

저 같은 경우엔 죽였죠.

 

(이야~)

 

벤자민

성종은 안 했어요. 

 

블루이

확실합니까?

 

벤자민

확실합니다. 성종은 오히려...

 

테디

어? 나는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빠밤!

 

batch_IMG_1807.jpg

 

벤자민

저는 이렇게 심한 벌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죠. 당연히 형벌은 있었는데... 

 

블루이 

일단 알겠습니다. 솔이 질문을 했고 크롱이 대답을 했죠. 

 

선조가 서손이라고 나라가 엄청 어렵고, 못 미더워했어요. 왜냐하면 이제까지 한 번도  서자도 아니고 서손이 왕이 된 적이 없었어요. 엄청 혈통을 무시한다더니 신하들도 오히려 선조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게 할 수 있는 말들을 많이 했다고 하고, 그런 분위기를 조장되었대요. 선조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는데, 사람들의 말로는 저렇게 어린 사람이 어떻게 왕의 권력을 행사하냐, 어떻게 저렇게 어린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냐고 했는데, 자기가 그만큼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크롱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인과 어린 아들을 고문해서 잔인하게 죽였어야 하나요? 게다가 치사자가 속출할 정도로 조사과정이 매우 매우 과격했어요. 그리고 중무사들이 대거 끌려가서 이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다고 합니다. 

 

잡혀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은데, 고문 사상자가 속출했다는 기록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크롱

책에서요.

 

어느 책에서요? 책에서 나온 것 확실합니까? 

 

크롱

네. 책에서 봤어요. 이건 다 책에서 적은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신하들이 선조를 못 미더워해요. 그런데, 자기는 왕인데, 그렇게 하면 신권정치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약간의 논란이 있더라도 그때는 강하게, 엄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롱

본보기로 죽였다는 말인가요?

 

본보기로 죽인 게 아니죠. 어쨌든 그 사람이 약간의 논란은 있었으니까.

 

테디

본보기로 죽이긴 했죠.

 

맞네요.

 

(하하하)

 

테디

그런데 그 당시의 왕의 힘이 그 정도는 되야 하지 않나 싶어요. 

 

크롱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가요?

 

테디

그런 것 같네요.

 

(하하하)

 

'10만 양병설과 선조의 판단'

 

 

테디

일단 임진왜란의 과정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얼마든지 붕당정치가 있었을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왕의 판단력인데요. 일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창했습니다. 알고 계시죠?

 

네.

 

batch_IMG_2257.jpg

 

테디

10만 양병설이란 조선 8도에 군사를 1만씩 두고, 수도에 2만을 두어서 여러 적들의 침입에 미리 대비를 하자고 해서 군사 10만을 상시에 두자는 말이었는데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참 전의 일이예요. 선조에게도 건의했지만, 선조는 여러 이유에서 하지 않았어요. 반대하는 신하들도 있었겠고요. 

 

이이가 죽고서 일본의 조짐이 이상하자 선조가 나중에 늦게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으로 정탐하러 보냅니다. 정식 사절단으로 보냈는데, 이것이 전쟁의 여지가 있느냐 없느냐고 판단하러 보낸 겁니다. 황윤길은 찬성하고, 김성일은 반대합니다. 각자의 당파가 있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또 싸우게 됩니다. 한쪽은 전쟁은 말도 안 된다, 한쪽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결국 선조의 판단은 전쟁이 안 일어난다였습니다. 저는 선조의 큰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조가 그때 전쟁이 안 일어난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쟁에 대한 준비를 했습니다. 군사훈련을 계속 시키고요. 북방의 변에 군사를 배치했고요. 전쟁 이틀 전 죄수들을 풀어서 군사로 만들었습니다.

 

테디

전쟁 나기 이틀 전에요? 그것을 대비했다고 할 수 없는 것 같은데요.

 

실록에서 보기로는, 왕이 이야기한 것은 정식으로 준비를 하면, 국내가 혼란스럽고 백성들의 민심이 흐트러진다고 해서 이야기를 안 하고 준비를 해왔다고 합니다. 

 

테디

그 주장은 맞아요. 군대를 준비하면 민심이 흐트러진다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전쟁준비를 시작했어야 하는 시기 아닙니까.

 

그래서 했잖아요.

 

테디

민심이 흐트러질까 봐 안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안 했는데...

 

테디

기본적으로 나라가 그 정도의 군사력은 당연히 있어야겠죠. 하지만 신하들이 주장한 것은 지금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있으니까 준전시 상황에 대비하자는 것이었어요. 그 주장을 듣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선조가 불안해서, 이틀 전에 죄수를 풀었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일본이 곧 쳐들어올 것 같아서...

 

테디

하지만 그것은 너무 늦은 처사죠. 이틀 만에 전쟁준비를 어떻게 합니까?

 

그건 인정합니다.

 

(하하하)

 

준비가 늦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 때 선조의 생각은 민심이 흐트러지면, 나라가 혼란스럽고, 혹시라도 전쟁이 안 일어날 상황에 대비를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까?

 

테디

저는 조금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느 부분이?

 

테디

민심이 흐트러지는 것도 잘 알 수가 없어요. 나라가 돈이 많고 군사가 센 나라일수록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민심이 흐트러질까 봐 전쟁준비를 안했다? 이것은 판단의 패착이죠. 그것을 감수하고 전쟁준비를 시작했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는 거죠. 잘못하셨죠?

 

 

벤자민

네, 아니오로 대답하세요. 

(하하하)

 

(벤이 솔에게 당한 것과 똑같이 공격을 하네요.^^)

 

 

batch_IMG_2269.jpg

 

 

'선조가 아니면, 이순신도 없었어!'

 

 

그렇지만 약간의 준비는 했습니다. 정식으로는 안 했지만..

 

테디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레몬

태조도 했어...

 

테디

그 정도는 어떤 왕이든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준비를 아예 안 했다면, 일반적으로 군사를 놔뒀겠죠? 정말로 아무 대책이 없었겠죠?

 

테디

그죠. 그랬다는 말은 아닌데요. 전쟁의 흐름을 읽었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도 늦게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살짝 읽었습니다.

 

테디

이틀 전에?

 

(하하하)

 

선조가 이순신도 데려오고 했습니다.

 

블루이

어쨌든 이순신 같은 장군을 8계급 특진시켜서 전장에 내보내고, 훌륭한 업적을 쌓게 했고. 그것은 이순신의 업적이지만 선조의 업적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만약에 임진왜란을 통해서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고 쫄딱 망해버렸다면, 선조를 욕해 마땅한데. 그렇진 않잖아요. 정치를 결과로 말한다고 누가 이야기했죠?

 

테디

제가 말했습니다.

 

(하하하)

 

블루이

결과적으로 망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선조는 준비를 했거나 말거나... 공격의 포인트가 참 애매해요.

 

테디

시기가 중요한 건데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중용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아무리 길어도 5년 전입니다. 정확하진 않은데요. 이것은 이순신 개인이 뛰어나서 준비한 것이지, 선조가 준비하라고 명령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전쟁의 흐름을 먼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보다 훨씬 전이었다는 말이죠. 10년 아니면 20년 전입니다. 그사이에 준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는데...

 

블루이

그 시각은 테디의 시각인가요? 역사학자들의 시각인가요? 전쟁의 흐름을 10~20년 전에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테디

역사적 사실로서, 황윤길과 김성일을 보낸 것은, 이순신을 중용하기 훨씬 전의 일이고, 500년에서 보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적어도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블루이

선조가 전쟁의 흐름을 미리 10~20년 전에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저는 이해가 잘 안 가요. 10~20년 전에 어떻게 전쟁의 흐름을 읽을 수 있을까?

 

테디

아, 그런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역사학자의 시각은 아니고, 저의 시각인 건데요. 일본이 전국을 통일하고,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는지를 보면요. 일본이 많은 나라로 나뉘어서 사무라이가 싸우다가, 나라를 통일했어요. 전 국민이 다 군사인데, 더이상 전쟁을 할 일이 없는 거예요.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 힘을 외부로 돌리면서 생긴 일인데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하고서 어느 정도는 국제적인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해요. 

 

일단 일본이 전쟁준비를 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라고 사신들을 보낸 것에서부터, 전쟁의 흐름이 아주 없진 않구나, 읽으려면 읽을 수는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이순신을 중용한 것은 그 이후 일이예요. 일본이 전쟁준비를 한 것은 최소한 15년 정도는 했는데, 전국을 통일하고서 바로 쳐들어온 것은 아니란 말이죠. 내부의 정리도 해야 되니까요. 그래서 일단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말하기도 했고, 그렇게 주장한 이유가 있잖아요. 왜 10만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게 북쪽에도 있었지만, 일본에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것을 듣지 않고, 사신을 보내서 알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이순신이란 영웅이 나오긴 했지만, 선조가 그것을 예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예견했다면, 훨씬 피해도 적고 전쟁도 빨리 끝났을 것이다. 서울을 뺏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는 의견입니다.

 

네, 10만 양병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이이가 주장한 게 아니고, 선조가 먼저 주장했습니다. 이이가 주장하기 전에, 선조가 먼저 이이에게 이야기했고 이이가 실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관리들의 반대가 심해서, 잘 되지 않았던 것이죠.

 

블루이

그래요? 그러면 선조는 준비했네요?

 

테디

했네.

 

(하하하)

 

테디

나도 몰랐어 사실. 

 

batch_IMG_1800.jpg

 

 

블루이

더구나, 임진왜란은 조선의 입장에서 이순신이란 장군이 잘 이끌어서 격퇴를 잘 한 전쟁이었죠. 그러니까, 선조는 잘 한거다라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일 수도 있어요.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좀 더 잘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게. 그게 참, 어떤 왕에게도 공격할 수 있는 거겠죠. 왜 80살에게 고문합니까? 79살은... 그런 식이라면 조금씩 다 공격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약간 부적절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테디

그러니까, 미리 읽지 못한 것이요? 

 

블루이

그렇죠. 5년 전이면 늦습니다. 6년 전이면 빠릅니다 하는...

 

테디

제 질문의 요지는 그겁니다. 사신을 두 명 보냈어요. 그 두 명이 각 당파가 있는데, 한 사람은 전쟁이 난다, 한 사람은 전쟁이 안난다였는데, 거기서 결국 선조의 판단은 전쟁이 안 난다였어요. 제가 거기에 문제를 제기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선조 때가 왕권이 강한 시절은 아니었잖아요, 그때 일본과 전쟁이 안 날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속한 당이 권력이 있는 당이었어요. 그래서 그때는 왕권이 약했으니까 대신들의 권력이 셌겠죠? 그 속에 이순신 친구 유성룡이 강력하게 전쟁이 안 일어난다고 추진했고, 10만 양병설에 반대한 사람입니다.

 

테디

일단 알겠습니다. 10만 양병설에 대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공이 같다고?'

 

 

batch_IMG_2244.jpg

 

크롱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이들을 어떻게 대우해줬나요? 

 

관직을 내리고, 승진시켰습니다. 그에 따른 공도 챙겨주고 했습니다. 

 

크롱

그런데 제가 찾아본 바로는 원균을 이순신과 동급으로 대우를 해줬다는데요.

 

원균이 어떤 사람입니까?

 

크롱

일단 이순신을 모함하고, 헷갈리긴 하는데, 거의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요.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같이 있었던 장군인데, 그 사람이 자신의 공을 과장해서 왕에게 올려서 문제가 된 일이고요. 이순신과 선조에 대한 논란은 많습니다. 사이가 안좋았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선조를 고문했다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확실하게 밝혀두자면, 난중일기에서 자신이 고문을 받은 직후, 말을 타고 신하들과 술도 마시고 놀았다고 하는데, 고문을 받은 사람이 바로 그렇게 다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요. 설명을 보태자면, 원균이 그런 걸로 인해서 곤장을 맞았어요. 그 후 며칠 동안 걷지도 못했다고 하길래, 이순신은 고문을 받은 것이 아니고요. 

 

그리고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은, 이순신의 위상이 높잖아요. 백성들의 민심도 얻고요. 그 때 왕의 입장에선 불안해요.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거죠. 나라도 혼란스러운데 왕위까지 위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 벼랑 끝까지 온 거죠. 

 

 

batch_IMG_1798.jpg

 

 

크롱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를 물어본 게 아니라 왜 원균이 이순신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는지를 물어봤습니다.

 

그걸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야기가 좀 깁니다. 크롱이 말씀하시는 원균이 받은 대우가 어느 정도입니까? 그걸 모르는데 어떻게 이순신과 같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테디

공신의 순위? 1등 공신, 2등 공신, 3등 공신?

 

크롱

맞아요. 그렇게 했는데, 원래 신하가 그것을 매겼어요. 1등에 이순신과 다른 사람이 있었고, 2등에 원균과 다른 사람, 3등에 누구누구 있었는데, 선조가 원균을 1등으로 올리라고 말해서 결국 1등으로 올린 거예요. 그리고 발표가 났는데....

 

그것은 이순신을 견제함을 위함이 아닌가요?

 

크롱

견제하기 위함이면, 이순신을 내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내렸잖아요. 2등으로. 

 

크롱

이순신은 1등으로 있고, 원균을 올렸다고요. 선조가 2등에 있던 원균을 1등으로 올리라고 해서 원균이 1등으로 올랐어요. 

 

크롱이 이야기한 것과 제가 이야기한 것이 조금 다른데요. 원균이 어디 위치해있는지는 몰랐는데, 이순신이 두 번째에 있다고 저는 알고 있어요.

 

크롱

저는 관직 같은 것은 잘 알아봤는데...

 

테디

이순신도 임진왜란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다 죽었지만, 원균도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다 죽었거든요.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원균도 결국 전쟁에서 싸우다 죽었단 말이죠. 그런데 똑같이 전쟁에서 역시 싸우다가 죽은 두 장수를 달리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크롱

왜냐하면 이순신은 평소에 왜군의 이동 경로를 섬세하게 알고 있었고, 부하들을 불러서 술을 마시면서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좀 더 계획에 대해서 구상하고, 구성원들의 사이를 좋게 해서, 친밀함을 얻었대요. 그래서 군사들이 잘 따랐는데, 이순신과 원균이 자리가 바뀌었을 때 원균은 왜적들의 이동경로 등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부하들은 원균을 보는 일이 굉장히 드물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원균이 숙소 안에서 기생과 첩이랑 노느라 밖으로 나오는 일이 굉장히 드물었다고 해요. 결국엔 그래서 졌잖아요. 게다가 원균은 도망치다가 죽었어요. 

 

도암치다가 죽은 것도 책에서 안 겁니까?

 

크롱

네. 산속으로 혼자 도망을 갔어요. 

 

바다에서 싸우다가 어떻게 산속으로 도망을 가요? 

 

크롱

아닌데? 산속에서 숨어있다가 왜적들에게 발견되어서 죽었다고 해요. 

 

그 과정이 납득이 안 됩니다.

 

크롱

과정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있습니다.

 

블루이

자 정리를 좀 해볼게요. 원균과 이순신 그리고 선조가 그 둘을 어떻게 대우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였어요. 선조가 원균과 이순신을 동등하게 대우했고, 크롱은 선조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 문제 제기였고요. 솔은 그럴 수도 있다는 취지의 답변이었습니다. 또 다른 질문 있나요?

 

 

'원균은 싸우다 죽었나?'

 

batch_IMG_2267.jpg

 

 

마리모

테디가 원균이 왜군과 열심히 싸우다 죽었다고 했는데 제가...

 

블루이

아니오 테디는 원균이 임진왜란 때 싸우다 전사했다고 했죠. 왜군들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가 아니고, 임진왜란 때 전쟁 중에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했죠.

 

마리모 

싸우다 죽은게 아니라 도망치다가 뒤에서 왜군들이 쏜 총에 맞고 쓰러져 죽었다고...

 

블루이

그게 표현의 문제인데요. 이렇게 해서 싸우다 죽건, 내가 맞을까 봐 도망가다가 죽건 싸우다 죽은 거죠? 마리모가과 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마리모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닌데, 어렸을 때부터 이순신을 좋아해서 거기에 대한 책이나 자료를 많이 찾아봐서...

 

블루이

그럼 조금 전에 크롱이 질문한 내용에 대해서 마리모가 아는 바가 있다면, 답변할 수 있을까요? 

 

마리모

어떤 질문이죠...?

 

블루이

원균과 이순신이 선조에게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정당한 일이었나요, 부당한 일이었나요?

 

 

batch_IMG_2284.jpg

 

 

마리모

저도 크롱의 의견과 비슷하게 원균이 이순신이랑 직위가 같다는 게 조금 그렇습니다. 원균이 별 활약을 펼치지 못했는데, 그렇게 직위가 높은 게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원균이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정리 발언>

책에서 본 건데, 강대국은 영토를 넓이는 것만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는데, 소국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큰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큰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 임진왜란 때 나라를 잘 지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블루이

그럼 가야는 어떻게 된 겁니까?

 

(하하하)

 

솔 

가야도 대단합니다!!

 

블루이

왜 못 지켰잖아요? 수고했습니다!

 

(짝짝짝)

 

batch_IMG_2288.jpg

 

한 시간이 넘는 토론 과정을 거친 왕, 선조! 수고하셨습니다!

(솔 : 아이구 힘들다)

 

batch_IMG_2264.jpg

 


선조를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에 짬을 내서

다음 차례 광해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들!!

 

친구들인 이렇게 쉬는 시간마다 짬짬이 다음 질문을 점검합니다.

 

batch_IMG_1814.jpg

 


 

이번에는 인조반정으로 시호도 받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물러났지만, 

요즘 영화 등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는 중립외교, 광해군입니다.

 

전하, 모시겠습니다.

 

14대 광해군 / 제이크

 

batch_IMG_1815.jpg

 

 

 

안녕하세요. 빛나는 바다, 광해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왕비를 두 명, 후궁을 여섯 명 두셨는데요. 저는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관례대로라면 세자가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지요. 후궁의 아들만 해도 열세 명이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조정에서는 영민하고 총명한 저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이미 나오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큰일이 좀 있었지요. 임진년에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나라에 난리가 났죠. 당시 저희 아버지가 왕이셨는데요. 명나라 옆에 붙어있는 의주로 몸을 피하셨어요. 그리고 저는 왜란 중 세자로 책봉되어 아버지보다 더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온 나라를 뛰어다녔어요. 북쪽으로는 평안도 함경도, 남쪽으로는 전라도 경상도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했습니다. 왕이 도망가니까 백성들이 화가 나서 궁궐에 불까지 질렀잖아요. 세자인 내가 여기 왔으니 조선은 아직 백성을 버린 게 아니다, 외치며 백성들을 달랬습니다. 그다음엔 왜에 맞서 싸울 군사를 모집했어요. 군사들을 먹일 군량미도 조달했고요. 그리고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왜구와 싸웠습니다. 군사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가 싸운 왕이 조선에 몇 안 되거든요. 사람들은 임진왜란의 영웅

이라 하면 다들 이순신만 떠올리는데, 조금 섭섭합니다.

 

batch_IMG_1819.jpg

 

왜란 후에는 왕이 되어 나라를 수습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우선 세금 제도를 바꿨어요. 그 전에는 아주 엉망이었거든요. 공납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각 지역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조정에 바치는 제도였어요. 몇 년 전에 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나왔는데, 거기 보면 농사짓는 소작농한테 전복을 바치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지역에 있지도 않은 물건을 바치라고 해서 백성들만 애먹고, 이웃이 도망가면 대신 내고, 돈 받고 대신 물건 내주는 대납가만 성행하고,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없앴습니다. 지역 특산물이니 뭐니 없애고, 누구나 구하기 쉬운 쌀로 세금을 통일했습니다. 그리고 가진 땅 크기에 따라서 있는 사람은 더 내고, 없는 사람은 좀 덜 내게 했습니다. 종합소득세 같은 거죠. 이후 관리들의 부패도 적어지고, 자연히 백성들의 부담도 줄었습니다.

안으로 문제를 해결했으니 바깥 이야기도 신경을 써야겠죠. 바로 외교입니다. 제 롤모델이 고려의 서희였는데요. 외교 좀 잘하고 싶었거든요. 왜와 약조를 맺었습니다. 기유년에 맺었다 해서 기유약조라 불러요. 임진왜란 막 끝나고 뒤숭숭할 때죠. 사이 좀 풀자고 약조를 손 내미는 일본에 ‘조선에 정식으로 국서를 보내라’, ‘왜란 때 조선 왕릉 파헤쳐 간 도굴꾼들 잡아 데려와라’, ‘잡아간 조선 포로 송환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쯤 북쪽 후금이 힘이 세졌어요. 힘이 세지니까 옆에 있는 명나라를 공격하는데, 명나라는 조선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가 도와줬으니 이번엔 조선이 도와달라는 거죠. 사실 명분만 놓고 보면 도와주는 게 맞죠. 그런데 그러면 백성들이 또 힘들어지잖아요. 전쟁 끝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그리고 사실 후금의 힘이 명나라를 뛰어넘을 정도로 커지고 있었거든요. 조정의 신하들은 그걸 몰랐을지 몰라도 저는 알았습니다. 명나라 도와줬다가 오히려 세게 얻어맞을 걸 직감한 겁니다. 그래서 안 도와줬어요. 의리? 명분? 그런 거 없어. 우리는 중립으로 할 거야.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했어요. 이게 사실 대단한 겁니다. 조선이 명분만 따지다가 결국 망했잖아요. 의리나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실리를 챙긴 제 외교는 당시 조선뿐 아니라 21세기의 리더에게도 필요한 모습이라 할 수 있지요.

 

(짝짝짝)

 

 

 

'왕권에 위협을 받은 광해군'

 

batch_IMG_1828.jpg

 

벤자민

제가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왕권의 위협을 굉장히 많이 느낀 왕이예요. 반대파로부터. 그래서 그들을 다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형까지도 유배 보낸 폭군이었고요. 그래서 광해군은 친정정치를 했다고 유명합니다. 이가 결과적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되고 폐위되는 계기가 됩니다. 친정정치가 잘 못 되었다고 하는데, 맞나요?

 

제이크

친정정치라고 하면, 형과 아우를 다 죽이고 유배시키는 그런 정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조반정은 나중에 일이니까,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요. 제가 즉위 전부터, 어릴 때부터 압박이 심했거든요. 조정에서는 세자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다른 경쟁자들도 많고, 특히 왕인 아버지에게 신임을 못 얻어서 압박이 심했어요. 이게 16년 이거든요. 그리고 즉위를 한 뒤에도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요. 그때 아버지께서 첫 왕비가 돌아가신 후에 왕비를 한 명 더 들이거든요. 인목왕후라고. 그 때가 세자가 이미 되고 나서였어요. 후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세자가 이미 있는데 왕비를 들일 이유가 없거든요. 그 왕비가 아들까지 낳으니까 저는 불안한 거죠.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세력들이 점점 나타나고요. 이건 우연히 발견한 건데, 나중에 보니까 관직에서 파직된 사람들의 비리를 조사하다가, 어떤 사람이 자금을 모으는 게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시키겠다는 반란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비리를 저질렀다고 자백을 했어요. 

 

불안한 거죠. 불안한 사항은 다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이성계부터 성종까지 내려왔다는 왕 씨 배척도 그렇고 태종의 공신들 숙청도 다 똑같은 거죠. 

 

블루이

다음 질문 해주세요.

 

테디

루시 괜찮아?

(루시는 전날 세미나 준비로 밤을 새가며 공부했습니다...^^)

 

(햐하하)

 

 

batch_IMG_1824.jpg

 

 

제가 벤이 한 것에 덧붙이자면, 전 왕들도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위협세력을 없앴다고 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왕이었을 때 그런 거예요. 광해군은 세자였을 때 그런거잖아요.

 

제이크

세자였을 때... 왕이 되기 전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때 제가 뭘 했죠? 제가 무슨 짓을 했죠?

 

다 죽였죠.

 

테디

왕 되고 나서 죽인 건데?

 

아니야~

 

벤자민

즉위 초에 그랬어요.

 

테디

즉위가 뭔데요? 왕이 된다는 뜻이잖아요. 

 

벤자민

왕이 되고 나서.

 

되고 나서.

 

오케이~

 

(하하하)

 

블루이

실패! 

 

(하하하)

 

아아, 다른 거요! 

 

(하하하)

 

무리하게 궁을 짓는 사업을 강행한 이유가 뭔가요? 

 

제이크

그거야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많이 불탔으니까 그런거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강행된 이후로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물러나셨잖아요. 아니지, 뭐래니, 나?

 

아니 어쨌든,, 아 뭐래!!

 

(하하하)

 

밤을 새면 안된다는 좋은 교훈이...

 

(하하하)

(세미나 준비하느라 솔도 거의 밤을 샜어요.^^)

 

어쨌든 광해군이 나가고 나서 집권한 서인 남인 정권이... 안 할게요.

 

 

'역사의 평가, 폭군이냐 성군이냐'

 

 

batch_IMG_1825.jpg

 

 

크롱

광해군이 현대에서 광해군 재평가를 하며 미화를 하면서 거품이 끓어 넘치고 있다고 하는데, 왜 미화가 되고 있나요?

 

제이크

미화가 된다기보단 재평가가 되는 거죠. 

 

(하하하)

 

평가를 다시 하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많이 나오니까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파보니까 긍정적인 반응이 많이 나오는 거죠. 잘했잖아요? 외교도 잘하고요. 세금도...

 

크롱

그런데 연산군과 양대 폭군으로 뽑혔는데요.

 

제이크

그것은 이름 탓이 커요. 군으로 끝나잖아요. 사람들이 선입견을 가지는 거예요.

 

크롱

군은 잘 못 했던 왕들에게 붙이는 이름 아닌가요?

 

 

batch_IMG_1817.jpg

 

 

제이크

폐위되서 왕이라는 존함을 받지 못하고 군으로 남게 된 거죠. 그런데 저를 끌어내린 인조반정의 주축인 서인들의 탓이 커요. 서인들이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했거든요. 대동법을 시행하니까 서인들은 마음에 안 든 거예요. 제가 주로 가까이했던 세력은 북인들이었어요. 보다 개방적이고 젊은 사람들이었죠. 반면 서인들은 지주들, 즉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었거든요. 대동법을 시행하자 자기들이 세금을 많이 내니까 불만이 많죠. 중립외교 할 때도 서인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있었어요.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안 도와준다고 하니까 이 사람들도 불만이 많았던 거죠. 저에게 불만이 많고 정권탈취를 목표로 했던 서인들이 저를 인조반정으로 몰아내고 그 후에 조선을 300년 동안 지배했거든요 서인들이. 그러니까 저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안 좋게 써있지 않았을까요? 서인들이 작성한 평가에 따라서 우리가 광해군을 폭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와서 현대에 점점 평가가 자세하기 들어가니까 생각보다 잘했다는 평가가 들어가는 거죠.

 

 

 

'대동법과 국가재정'

 

batch_IMG_2313.jpg


 

다시 하겠습니다. 궁궐사업을 너무 무리하게 하셔서 궁에서 내쫓긴 다음에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지배했잖아요. 그때 재정이 파탄 나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 문제를 느끼십니까?

 

제이크

광해 때 궁궐사업을 무리하게 하다 재정을 다 말아먹어서 다음 정부가 재정이 없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끝난 직후잖아요. 제가 왕에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궁궐을 지어야 할 것 아니에요. 다 불타고 없어졌는데.

 

대신할 궁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재정이 안 좋은 것을 알면서도 굳이 궁궐을 끝까지 밀어붙인 이유가 뭔지요?

 

제이크

저는 길게 보고 앞으로 재정이 좋아질 것이라고 봤어요. 그래서 궁궐 공사도 처음에 무리하다 싶을 정도의 예산이었지만 강행한 거고요.

 

판단력이 안 좋으신 것 아닙니까?

 

제이크 

아니, 아니, 대동법 시행 다음에는 부패도 줄고 백성들의 세금도 원활하게 걷으니까 재정이 확충됐지 않습니까.

 

임진왜란 이후에는 재정이 많이 안 좋았잖아요.

 

제이크

임진왜란 때 재정이 안 좋았으니까 세금제도를 개혁하고 서서히 늘려나가는 과정이었죠. 그 과정에서 궁궐도 복원해야 할 것 아니에요. 왕도 지내야 할 곳이 있고, 민심을 잔뜩 얻은 광해 정도면 번듯한 집에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하하하)

 

광해가 그 번듯한 집에 살기 위해서 백성들을 착취한 것 아닌지요?

 

제이크

궁궐공사는 원래 힘들어요. 어려울 때 궁궐공사를 한 사례도 많이 있거든요.

 

테디

어떤 사례가 있죠?

 

제이크

본인, 태종 때 흉년이 들었는데, 궁궐공사한다며 반대하는 신하들을 투옥시키고요. 

 

(이야~)

 

또, 옆에 계신 성종도 흉년 때 세자궁을 공사한다고 하셨고요. 

 

(오우~)

 

저희 아버지께서도 왜란으로 나라가 피폐한데도 창덕궁을 고쳤습니다.

 

레몬

태조는?

 

테디

태조는 아예 궁궐을 세웠잖아!

 

제이크

궁궐을 짓는 것은 원래 힘들어요. 그렇게 큰 건물을 짓기가 얼마나 어렵겠어요. 

 

힘든 것은 당연하죠. 돈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강행시켰다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요?

 

제이크

돈이 없었죠. 하지만 돈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야~)

 

그러면 이것에 대해서 실패한 것을 인정하시는 거예요?

 

제이크

실패했죠. 제가 인조반정으로 일찍 나왔으니까요. 제가 더 오래 했다면, 나라 곳간도 빵빵하게 채웠을 텐데.

 

 

'일본과 화해한 광해군?'

 

 

batch_IMG_1827.jpg

 

테디

왜란 이후에 일본 왕에게 화해를 신청했다고 하셨는데, 그때 정확히 요구한 바가 무엇입니까?

 

제이크

우리가 먼저 화해를 신청한 게 아니고, 일본 측에서 먼저 신청했습니다. 

 

테디

일본에서 요구한 사항과 우리가 요구한 사항은 무엇인지요?

 

제이크

친교를 맺은 거죠. 일본은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막부시대가 열렸죠. 조선에게 정식으로 국서를 보내라, 임진왜란 때 왕릉을 털어간 도굴꾼을 잡아 오고, 포로를 송환하라입니다.

 

테디

이 측면에선 되게 잘했다고 보는데요. 일제강점기 이후에 우리나라가 일본과 국교가 없었는데, 1963년에 한일국교정상화를 맺으면서 우리가 받아야할 사과를 받지도 못하고 약간의 차관으로 쉽게 화해한다는 비판이 있었어요. 조선도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안 되었는데, 결국 일본과 국교를 맺었습니까? 요구사항을 제대로 받아 냈습니까?

 

제이크

제대로 받아냈다기보단, 일본에서 꾸며서 보냈어요. 양식 맞춘다고 조서도 조작하고 도장도 조작하고요. 그리고 도굴꾼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잡범을 잡아서 보내고요. 제대로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아요.

 

테디

그것을 일본 측의 오류일 수도 있으나, 너무 빠른 시기에 일본과 국교를 맺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조선통신사가 오가면서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것인데 임진왜란에 대한 국가 차원의 사과를 받고 그에 따른 국내 처벌이나 우리나라로 송환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저는 굴욕외교라고 생각합니다. 

 

제이크

저의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이 힘이 셌잖아요. 그때부터 조선과 비교하면 일본이 항상 셌거든요. 

 

테디

힘이 세다는 이유로 굴욕외교를 해야합니까? 명분이 없단말이죠. 광해군이 잘 못한 일이 아닌가?

 

사실 조정에서도 신하들의 반대가 많았어요. 명분을 받아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에도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 받을 것만 받아내자. 힘이 없는 자로서 힘을 맞췄는데, 그것을 굴욕적이라고 하면 섭섭하고요. 

 

테디

우리가 직접 피해를 입은 전쟁이잖아요.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국민 정서상 용납할 수 없거든요. 임진왜란이 있었기에 반일 감정이 엄청났을 거라고요. 전쟁이 채 20년도 안 돼서...

 

제이크

평화는 공존을 기본으로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블루이 

다음 질문 해주세요, 마이콜!

 

마이콜

광해...

 

(하하하)

 

batch_IMG_2316.jpg

 

<정리발언>

생각보다 쉽게 끝나서 약간 아쉽고요. 또 이렇게 끝나니, 광해군이 흠잡을 곳이 있습니까? 

 

있어요!

 

블루이

그럼 흠잡아보세요.

 

없어요...

 

(하하하)

 

흠이 없지 않습니까, 어디가 있습니까. 왜 폭군으로 묘사합니까? 미화가 아니라 재평가의 과정에 있습니다. 광해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개혁 군주, 정조대왕님을 모시겠습니다!

 

22대 정조 / 루시

 

batch_IMG_2319.jpg

 

자칭 만천명월주인옹, 온 천하를 밝히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 정조입니다. 정조는 조선의 왕들 중 가장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11살의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와 당시 집권당 노론으로 인해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 후 1년간의 대리청정을 한 뒤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하자 드디어 25세의 나이로 즉위합니다. 즉위 초 정조의 곁엔 세손 시절 노론으로부터 자신의 곁을 지킨 홍국영 뿐이었습니다. 정조는 먼저 노론의 시선이 모두 홍국영에게 쏠리도록 홍국영에게 막강한 권력을 준 후, 왕실 도서관이라는 명분과 함께 규장각을 설립합니다. 규장각은 조선 후기 문학을 일으킨 중심기관으로 왕의 초상화 어진과 왕이 직접 만든 물건이나 그림인 어제를 보관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인재를 창출하고 이로 인해 정조 근위세력을 양성함으로써 외척과 환관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지도 제작과 미술, 활자, 천문에도 분야를 두었습니다. 규장각은 내각에서 편서와 간서 등의 업무 주관을 하고 외각에서 출판을 맡았으나 3년 후 외각에 검서관이라는 높은 직책을 두어 박제가 등의 서얼을 등용합니다.

batch_IMG_2324.jpg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많은 책을 썼는데 군사 훈련 책 《무예도보통지》, 송시열의 문집을 정리한 《송자대전》, 정조 스스로의 글을 정리한 《홍재전서》 등이 있습니다. 또한 이순신의 글을 정리하여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이순신의 일기에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한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보완하여 만든 《대전통편》을 만들기도 합니다. 폐지된 조문까지 금폐로 표기함으로써 고려와 조선을 아우르는 법서로 거론됩니다. 또한 무신을 육성하는 장용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이 중 장용내영은 주로 수도에 있었으며 장용외영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화성에 주로 있으면서 정조 22년엔 그 수가 2만 명에 달하게 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해 수원에 능을 옮긴 뒤 그곳으로 수도를 천도하기 위해 수원화성을 짓습니다.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수원화성을 정조는 백성들의 신도시로 꿈꾸었으나, 안타깝게도 48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원화성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로 지어 건축 기간이 크게 단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됩니다. 또한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를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됩니다.


정조 시대는 실학을 수용해 실학자들의 정계 진출을 돕고 문화의 자긍심이 솟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기존 중국의 사대주의 문화 사상을 탈출해 귀족문화로만 여겨졌던 한문학 시단을 신분에 상관없이 함께 즐긴 조선 최고의 문예 부흥기로 꼽힙니다. 또한 정조는 소통에 있어서 개방적인 왕이었습니다. 노론이었던 심환지와의 일상적, 정치적인 편지가 300통 가까이 발견되는 한편, 백성들의 억울한 소리를 듣는 격졍도 1,335건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수원화성으로의 행차를 즐겼는데요, 이때도 백성들과 소통을 했습니다. 정조의 능행 횟수는 영조 78회, 정조 66회로 조선에서 두 번째이지만, 재위 기간을 놓고 평균을 봤을 때는 영조 연평균 1.5회, 정조 2.75회로 조선에서 가장 능행을 많이 했던 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신해통공을 실시해 육의전 이외 모든 시전에게 금난전권을 금지시킨 조치로 후에 조선 상업 발전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지방정치에도 높은 관심을 보여 암행어사의 연찰 범위를 세세하게 확대하고, 총 68회를 출두시켰습니다. 암행어사를 감찰하는 별건 어사의 활동도 53차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하들에게 일을 다 맡긴 무책임한 왕?'

 

batch_IMG_2330.jpg

 

모든 정치 문제를 신하들에게 맞겼다고 하는데, 왕 맞습니까?

 

루시

지방에도 암행어사를 출두시키는 등 학문 외에도 관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정보는 어디서 난 겁니까?

 

루시

책에서 봤습니다.

 

저도 책에서 봤는데, 정조가 학문 외에는 손을 댔더라도 거의 신하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움직였다고 하는데 왕으로서 책임이 없는 것 아닙니까?

 

루시

정조가 즉위할 당시 노론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 세력이 너무 커서 노론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신하들이 한 것이 맞습니까?

 

루시

신하들도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과 남인 등도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규장각을 세워서 이들과 서얼을 등용했거든요. 그래서 정조의 역할이 없진 않았습니다.

 

벤자민

솔의 의견 보충하겠습니다. 이처럼 정조가 정치문제를 신하들에게 떠넘기면서, 많은 폐단이 일어났어요. 신하들의 세도정치를 조장하는 폐단이 가장 컸고, 그의 이복형제들이 왕에서 몰아내고자 반역 음모를 여러 번 일으켰고, 홍성범 등이 이정근, 이찬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반란을 일으키는 등 왕권이 계속 흔들렸습니다. 

 

루시

이복형제들을 왕으로 추대시키려는 건 정조가 아니라 노론세력입니다. 노론세력이 정조를 끌어내리려고 이복동생을 사형시키기 전에 그쪽으로 몰아가서 정조가 많이 난감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정조가 후기에 세도정치를 했던 건 맞습니다.

 

벤자민

네.

 

(하하하)

 

 

'정조는 이모티콘의 시초?'

 

batch_IMG_2339.jpg

 

제이크

정조대왕 님께서 권위가 떨어지는 행실을 하셨다는데요. 신하랑 주고받은 서신첩에도 그렇고, 국무회의 중에 막말이나 욕설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해요.

 

(하하하)

 

굳이 예를 들진 않을게요.

 

블루이

예를 들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제이크

아...

 

(하하하)

 

호로자식이라는 말을 뱉은 적이 있고, '빌어먹을'이라는 말을 서신첩에서 썼대요. 개인적 감정으로 누군가를 유배 보내거나 한 것이 아니라서 괜찮다는 사람도 있는데, 귀감이 되어야 하는 대왕님께서 행실이 바르지 못해 옥체의 권위가 떨어진 것은 아닌지?

 

루시

서신첩에서는 심언지와 나는 것을 말씀하신 것 같은데, 심언지는 당시 야당이었기 때문에 반대파였거든요. 제 생각에는 이것은 친근한 표현으로, 다 갖춰서 말하면 반대파가 무슨 뜻이 있는지 의심을 하게 될까 봐, 평소에 쓰던 일상어로 친근한 표현으로 서신첩에 쓴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제이크

조선 최초로 이모티콘에 해당하는 한자를 사용한 대왕님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하하하)

 

블루이

왜 그러셨습니까? ㅋㅋㅋ, ㅎㅎㅎ 등 있잖아요.

 

제이크

지금의 ㅋㅋㅋ에 해당할 수 있는 ‘가가가’ 이런 것.

 

(하하하)

 

일기를 쓰는데,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었나 봐요. “새벽까지 안 자고 있다, 가가가” 이렇게 일기를 썼어요.

 

(하하하하)

 

루시

일상적인 표현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기분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테디

요즘 학생들의 인터넷 언어습관을 욕할 것만은 아니네요. 잦은 이모티콘의 사용 등.

 

(하하하)

 

 

'개혁의 좌절'

 

batch_IMG_2334.jpg

 

테디

제가 알기로는 정조대왕이 혁신적인 정책으로 나아가다가, 말년에 보수로 돌아섭니다. 그러면서 그 전에 해왔던 개혁들이 모두 좌절이 되고요. 그래서 나라 점점 힘을 잃게 되고 조선은 끝까지 내리막길을 걷다가 망하게 됩니다. 정조대왕 님 초기의 개혁적인 방향에는 의의가 있으나 마지막에 자신이 했던 모든 일들을 뒤엎는 반동정책은 왜 그러셨는지요? 결국 그 이후로 조선이 망하잖아요!

 

루시

외척세력에 권력을 넘겨주는 후기에 그런 행돋을 하는데요. 개혁이 실패했다는 것을 후기에 느끼고, 자신의 힘이나 규장각 등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외척세력으로 자신의 힘을 키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테디

조선을 망한 것이 정조의 책임이 아닌지요?

 

루시

거기까진 알 수 없지만, 약간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정조와 세도정치'

 

batch_IMG_2338.jpg

 

벤자민

홍국영을 믿고 정치를 많이 맡겼다고 하셨잖아요. 나중에 홍국영의 위상이 너무 올라가자 나중에는 그를 축출했어요. 이 이유가 무엇인가요? 단순히 그의 세력이 강해져서, 받을 것만 받고 버린 건가요?

 

루시

홍국영은 야망이 있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위가 올라가면서 비리나 폐단이 많아서 상소가 많이 올라왔어요. 처음에는 올려준 것 같은데, 나중에는 상소가 많이 올라와서 유배 보냈습니다. 

 

아까 테디가 한 말과 겹칠 수도 있는데요. 후반에 정조가 자기는 학문에 몰두하고 싶고, 왕위를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듯한 언행을 했다고 해요. 빨리 후자에게 넘겨주고 왕위를 떠나고 싶다는 것이 행동으로 드러났던 것 같은데, 자신이 왕인데도 마지막에 책임감이 없던 것이 아닌지?

 

루시 

그 정보는 처음 듣는 말이긴 합니다. 아버지를 죽인 노론세력과 당쟁이 반복되면서 지친 왕이 수원화성에 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정보는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조선왕조사에서 찾았습니다.

 

제이크

정조대왕이 나중에 책임을 소홀히 했던 사례가 있습니까?

 

사례는 모르겠는데, 자신은 학문에 몰두하고 싶고 왕위는 후손에게 물려주고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왕의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책임 있게 이끌고 나가야 하는 사람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래 사람들에게 세력을 건네주는 행위가 아닌가...

 

블루이 

그 생각으로 인해서 후대에 정조대왕이 잘 못 한 것이 없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블루이

솔의 질문은 그러므로 유약한 왕의 모습을 보였으므로, 그 자체가 문제성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던 거죠? 루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시

왕도 인간이다 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사례가 없으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이크

정조는 어떻게 왕위에서 내려오게 되었나요?

 

루시

암살 의혹도 있는데, 병이 있어서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블루이

방어찬스를 한 번 쓰겠습니다.

 

(오오~)

 

왕좌를 내려놓고 싶은 생각은 훌륭한 왕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죠. 권력을 놓고, 후대에 권력을 물려주겠다는 생각은 칭송받아야 하는 생각 아닐까요? 

 

테디

후계를 확실히 했다면 잘했다고 할 수 있는데, 아들들이 너무 어렸고, 물려받은 순조도 어린 나이에 물려받았죠. 

 

블루이

그건 아픈데 어떡해요. 어쨌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생각 아닐까요?

 

후대에 물려주겠다는 의지보단 단지 힘드니까 왕을 피하고 싶다는 의지가 더 큰 게 아니었나.

 

블루이

그러면 폭군인 사람이 왕좌를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하루라도 왕좌를 더 해 먹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성군인 사람이 왕좌를 내려놓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교를 했을 때 어느 쪽이 더 훌륭한 걸까요? 

 

정조대왕이 성군이라는 가정은 안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거죠.

 

 

아, 제가 대답해야 하는 건가요?

 

(하하하)

 

블루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정조대왕이 한 행위가, 미리 병을 알고서 왕위를 조금 더 확실하게 후대에 물려주었다면 마지막까지 미래에 도움이 되는 책임을 질 수 있지 않았나.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요. 

 

루시

정조가 승하하는 그해 초에 병이 나타납니다. 점점 심해져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병세가 악화되요. 마지막 승하하는 장소에, 대립 관계였던 정순왕후와 정조 둘이서 있어서 암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블루이

준비도 못 하고 황망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른 질문 해주세요.

 

벤자민

정조는 왕위에 있을 때,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노론을 계속 축출했습니다. 믿지도 않았고요. 노론이 세기도 했고요. 그렇다고 소론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많은 신하들이 당파싸움에 희생되었고, 정조도 희생된 사람의 수를 보고 놀랄 정도로 많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초기에 효과를 봤지만, 노론을 완전히 약하게 하기 위해서 수원으로 천도를 했다는 이유도 있는데요. 서로를 믿지 않으면서 당파싸움을 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루시

왕으로써 어느 한 쪽을 믿지 않은 것은 잘한 정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노론에 의해서 아버지가 희생당한 것을 보면서 트라우마가 굉장히 컸을 텐데, 노론이라고 다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노론을 수용하고 심환지와도 여러 편지를 나눕니다. 그런 왕이었습니다.

 

테디

수원화성을 왜 지으셨습니까?

 

루시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노론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테디 

수원화성을 지으면 왜 노론의 세력이 약해집니까?

 

루시

테디가 말씀하셨듯, 새 나라를 세우거나 수도를 천도하면 전 왕조의 수도서 힘을 가지고 있던 기득권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천도를 기획했습니다.

 

테디

수원으로 천도를 ‘계획’하셨다고요? 천도를 계획한 것은 아닌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짓는데, 공사기간을 줄였고 시작도 이르게 했고요. 정조대왕의 군대, 장용영을 새로 개편하고 수원화성을 만든 것은 쿠데타에 대한 방어책이었습니다. 누군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에는 수원으로 빨리 대피하고, 친위대인 장용영으로 쿠데타를 막자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학자들의 추측이 있어요. 수원화성으로 행차를 자주 했는데, 아버지 기일 때 그리워서 간 것도 있겠으나, 화성이 잘 되어가는지 점검하는 것이라고도 해요.

 

블루이

계획한 거잖아요? 철저하게 계획한 거죠. 아주 철저하게. 천도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쿠데타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볼 수 있겠네요.

 

(하하하)

 

<정리발언>

어린 나이 11세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연산군 같은 폭군이 되지 않고, 여러 정책을 시행하고 수원화성을 지으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정조는 성군이라고 불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마지막입니다. 대한제국을 세워 고종황제라고도 불리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현대사의 한발 앞인 근대사의 인물이라 더 큰 관심이 갑니다.

 

황제 폐하 모시고,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26대 고종 / 크롱

 

 

batch_IMG_2345.jpg

 

 

 제26대 왕인 고종 이희는 1852년 9월 8일에 태어났으며, 조선 왕조를 통틀어 세 번째로 재위 기간이 긴 왕입니다. 첫 이름은 개똥이였다가, 소년기 때 이명복으로 개명하고, 나중에는 이재황, 이형, 이태왕때는 이희라고 개명했습니다. 

 

 친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고종은 첫 번째로 민생안정을 정치 목표로 두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인 경복궁 재건으로 거두어들인 문세, 오부세, 결령, 원납전, 당백전을 전부 폐지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할 경우 그 친인척에게 책임을 씌워 강제로 받아내던 족징도 폐지했습니다. 또한 암행어사를 파견해 해묵은 폐단과 탐관오리들도 적발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치의 길도 갈아엎고 본격적인 개화, 개혁정책을 폈으며 자주적인 독립을 수호하려 했습니다. 또한 임오군란으로 화난 백성에게 지금의 정치인들도 하지 않는 장문의 사과문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batch_IMG_2347.jpg

 안타깝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고,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 한인 사관학교를 세우기로 합의했으나 실패하고 50만 환으로 상해 임시정부를 만들어 김규식 선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비자금을 타내 독립운동에 힘을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외국에 나가 망명정부를 차려 독립운동을 하려 했으나 1919년 1월 21일 붕어했습니다. 이후 고종의 죽음이 알려져 3.1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0년 <고종 시대의 재조명>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를 비롯해 여러 사학자들이 고종이 현명하고 의지가 굳었던 개혁 주군임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과 통상수교거부정책'

 

batch_IMG_2354.jpg

 

벤자민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시작하잖아요. 흥선대원군 때 많이 했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누그러졌어요. 조선이 일본에게 다양한 특권을 주는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는 데요. 강화도 조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일본에게 다양한 특권을 내주고요. 수구파와 개화파가 당파싸움을 일어나게 되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등 문제가 생깁니다. 세 개의 항구를 개방하고요.

 

크롱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치로 인해 국제 정세와 통상조약에 눈이 어두울 수밖에 없고요. 왜의 위협도 있었어요. 강화도 조약은 보기에는 훌륭해 보여요. 그런데 사실상 불평등했다는 이유가 조선과 일본의 상업발전 정도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차이고요. 그리고 대신들이 보기에도 백성들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이익이 있어 보여서 맺기로 했습니다. 물론 판단을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때는 옳은 선택을 했다고 봅니다.

 

벤자민

하지만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인의 출입이 많아지면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나중에는 농민들이 일어나는 동학농민운동도 일어나게 돼요. 여기서 많은 재정과 군사를 낭비합니다.

 

크롱

강화도 조약이, 일본이 억지로 들어왔잖아요. 억지로 들어와서 조약을 맺은 거라서 설사 이 조약을 안 맺었어도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고요. 판단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질책하기는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벤자민

하지만 흥선대원군처럼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시행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괜찮지 않을까요?

 

테디

네? 뭐라고요?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계속해야 했다고요?

 

벤자민

계속했으면, 강화도 조약이 아예 안 일어났을 수도 있잖아요. 

 

크롱

조금 더 넓게 보자면, 일본은 서양문물을 많이 들여와서 강했어요. 일본이 강했어요. 성장을 빨리했단 말이죠. 우리나라는 계속 쇄국 정책을 펴면서 개발이 덜 되었단 말이죠. 어떻게 그것을 계속 이어가겠습니까? 우리가 계속 쇄국을 한다고 일본이 안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고요. 이미 쳐들어온 기록이 있었잖아요. 언젠가는 쳐들어올 거였고, 우리나라도 개화를 시작해야 하는데, 흥선대원군이 타이밍이 안 좋았죠. 좀 세계를 보면서 했어야하는데, 흥선대원군이 일본과 청나라의 발전을 잘 확인하지 않고 제멋대로 쇄국정책을 시행했고요. 그때 쇄국정책을 그만하고 개화를 시작했다면, 일본과 충분히 비등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쇄국 정치를 이어간다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헤이그 특사'

 

batch_IMG_2350.jpg

 

일제에게 헤이그 특사가 들통났잖아요. 일제가 고종에게 추궁했겠죠, 왜 이렇게 했느냐고. 그때 고종은 자신이 신하들에게 시켜놓고, 아랫것들이 다 한 일이라고 해명하는데요. 헤이그 회의 문서에 옥새가 찍혀있을 것 아닙니까? 그 임명장을 들고 간 특사가 황제의 명을 받았다고 해서 전해준 건데, 그것을 남 탓으로 돌리면서 책임회피를 했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크롱

일단 왕은 살아있어야 하잖아요. 선조가 그랬듯이. 그리고 후대인 순종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고종이 살아있어야 한단 말이예요. 헤이그 특사를 했다고 하면, 일본은 분명히 별 핑계를 대서 왕을 끌어내리려고 할텐데, 그러면 일본이 점령한다거나 순종이 즉위할 수도 있잖아요. 아까 말했다시피 순종은 약했는데요. 그렇게 되면... 지금 거짓말을 했다는 게 문제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일본은 거짓말인 것을 알고 있었고, 나중에 걸렸어요. 인터뷰가 언론에 떴어요. 그걸 일본이 모를 리가 없잖아요. 다 아는 데도,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는 데도...

 

테디

어떤 내용의 인터뷰가 언론에 떴나요? 누구의 인터뷰가요?

 

고종.

 

테디

고종이 당시에 인터뷰를 했다고요?

 

확실한지는 모르겠는데, 언론에 떴다고는 적혀있습니다. 결국 알면서도 책임회피를 한 것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 탓을 하는 거잖아요. 어차피 다 걸린 상황에서 남 탓 해봤자 어차피 일본도 알고 있는 건데 오히려 더 화를 부른 것 아닌가요?

 

크롱

그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이 헷갈리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매력(?)이 있죠.

 

블루이

매력이 아니고 전략이겠죠.

 

(하하하)

 

크롱

아무튼 잘못이 없고요

 

테디

그 말은 선조처럼 어떻게든 왕은 살아야 한다.

 

왕이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들통이 났어요. 그런데도 거짓말한 이유가 뭐죠?

 

블루이

거짓말을 한 것을 인정하면 안 되는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요?

 

결국에는 다 인정했어요. 인정하고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죠. 그렇게 일이 끝나지 않고 일이 더 커졌어요. 

 

크롱

일이 더 커진 걸 저에게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게 고종에게 책임이 있는 거잖아요. 

 

블루이

솔은 처음부터 인정했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진 것은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일본군에게 걸렸는데, 자기는 모르겠다고 내뺀 거죠. 그랬는데, 그것 때문에 일본이 더 화가 난 거죠.

 

크롱

일본이 정의로운 나라였나요?

 

일본이 정의로운 나라는 아니었지만, 일본이 통치를 받는 상황에서, 일본이 정의로운 나라인 것은 상관이 없죠.

 

크롱

거짓말을 한 것에서 왜 분노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단 그 문제를 뒤로 제쳐놓고...

 

왜요?

 

(하하하)

 

크롱

일단 거짓말을 한 게 문제라는 거잖아요. 

 

거짓말을 해서 일이 더 커진 게 문제인 거죠. 

 

크롱

생각해봐요. 고종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블루이

정리를 하자면, 헤이그 특사를 보낸 것은 잘한 일입니까?

 

크롱

잘 한 일입니다.

 

블루이

그것을 일본이 알게끔 한 것은 고종의 책임이 있습니까?

 

크롱

아니오. 책임이 조금 있겠지만요.

 

블루이

그것을 숨기려고 했는데 걸렸어요.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어요. 인정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 입니까?

 

크롱

잘 한 것도 아니고, 못 한 것도 아니에요.

 

블루이

그러고 나서 결과적으로 더 나빠졌어요. 거기에는 고종의 책임이 있습니까?

 

크롱

책임은 있지만 잘못은 없습니다.

 

(하하하)

 

 

 

'암행어사 출두요!'

 

batch_IMG_2365.jpg

 

제이크

암행어사를 보내서 탐관오리를 잡았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고종이 직접 매관매직, 관직을 사고파는 행위를 주도했다고 하는데요. 

 

크롱

그것은 후에 일입니다. 이것은 즉위 초에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민중을 위한 정책을 시작했는데요.

 

제이크

암행어사를 파견해서 탐관오리를 잡은 것은 즉위 초의 일이다?

 

크롱

뒤로 갈수록, 먹고 살기가 팍팍해지잖아요. 그렇게라도 해서 세금을 걷어야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할 텐데...

 

제이크

먹고 살기가 팍팍해지잖아요. 농민운동이 괜히 일어난 게 아니라, 이런 것 때문에 일어난 것 아닙니까? 왕이 직접 나서서 청렴했다면, 농민들이 분노할만한 상황은 아니지 않을까요?

 

크롱

분노할 만 하지만, 고종의 잘못은 없습니다.

 

테디

왜 잘못이 없나요? 논리적으로 입증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블루이

나라의 살림이 팍팍해서 그렇게라도 세수를 충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답변을 했어요. 제이크는 아, 그렇군요 하고 넘어갈 겁니까, 더 질문을 할겁니까?

 

제이크

격차가 너무 커지는 것 아닙니까? 하층민과 관리들의 격차가. 

 

크롱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테디

암행어사를 각 지방에 파견하셨습니까? 그것이 관리들을 관리하는데 효과를 보지 못 한 것 같아요. 동학농민운동의 시초가 되었던 군수 조병갑을 보면, 그 사람의 비리와 횡포가 동학농민운동까지 이어진 것 아닙니까. 그 사례를 보면 암행어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블루이

암행어사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는데, 그 책임은 조정에 있습니까, 암행에게 있습니까?

 

테디

저는 시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축적된 시대의 잘못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고종이 암행어사를 각 지방으로 보낸 것이 고종의 덕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실패했기에 고종의 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을사조약? 을사늑약?'

 

batch_IMG_2370.jpg

 

 

 

레몬

고종은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었으며,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는 왕이었습니다. 일본에게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는데, 그것은 잘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모

아, 내가 할려고 한 질문인데!

 

블루이

굉장히 중요한, 이 세미나의 핵심이 되는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었죠. 당신은 을사조약을 체결한 아주 나쁜 왕입니다.라는 날카로운 지적이었죠. 훌륭합니다.  그런데 정확한 질문이 뭡니까? ‘왜 을사조약을 체결했습니까 나쁜왕아!’하고 찔러야지. 내가 찔렀어요. 왜 을사조약을 체결하셨습니까?

 

(하하하)

 

 

batch_IMG_2376.jpg

 

 

크롱

억울하게 체결되긴 했지만, 그게 없었다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조약을 맺은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나라를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레몬

음… 결국 뺏겼잖아요!!

 

크롱

결국 뺏기긴 했는데, 몇 년을 더 연장했잖아요.

 

블루이 (레몬에게 귓속말)

그래서 을사조약을 잘했다는 겁니까? 을사조약은 을사늑약으로 불리는 치욕의 역사입니다! 

 

블루이 

을사조약으로 고종을 공격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공격할 수 없다는 이야기예요. 을사조약은 고종이 잘못한 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죠. 레몬이 핵심을 찌른 거예요.

 

테디

을사조약, 이것은 조약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05년도에 맺었는데요. 왜 문제냐를 따져봐야 합니다. 조선의 외교권이 뺏깁니다. 외교권이 뺏긴다면, 우리나라가 외국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는 등을 모두 일본에게 넘겨주는 것인데요. 말 그대로 진짜 속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을사조약을 맺은 이상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통상조약을 마음대로 맺을 수 없습니다.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 정부 위에 있는 것이죠. 이것을 허락했다는 것, 혹은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고종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결국 몇 년 나라를 잇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오히려 더 좋은 명분을 주게 된 거고요. 결국 옥새를 찍으면서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사실상 일본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죠. 그것을 고종이 했는데, 그래서 나라를 팔아먹은 조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나라의 명맥을 유지했다는 명분이 될 수 있습니까?

 

크롱

솔직히 잘못 했다고 보지만...ㅠㅠ

 

블루이

이것은 명백히 잘못한 것에 대한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면 됩니다. 그러면 되는 것 같아요. 일단 을사조약은 잘 못 했다고 하면 끝내고 넘어가는 걸로 합시다. 

 

 

'명성황후 시해'

 

루시

명성황후가 일본에 변란을 당하고 나서 죽음을 발표하지도 못하고, 왕비에서 폐한 상태였는데요. 변란이 생긴 지 닷새 만에 예전에 총애했던 상궁 엄 씨를 불러들였어요.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고종에게 양심이 있냐고 탄식했다고 하는데요.

 

(하하하)

(양심 있냐고 탄식했다고요?)

(양심 있냐~?)

(모범적이지 못하고요.)

 

 

크롱

그런데 어떤 왕은 29명의 자녀도 있는데... 명성 황후가 임오군란의 원인이었잖아요. 그런데 명성 황후가 고종의 사랑을 받긴 했으나 저는 명성 황후가 위인이라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그 사람이 죽어서 다시 고종이 아내를 들였다는 게, 저는 별생각이 없습니다.

 

루시

다른 아내를 들인 것에 대해서 뭐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뒤에 닷새만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게...

 

크롱

그 사람도 힘들었겠죠. 

 

 

'아관파천, '이번엔 어디로 가십니까?''

 

 

블루이

제가 질문할게요. 아관파천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거죠. 아까 고종께서 선조에게 광해군에게 맡기고 도망갔다고 하셨죠. 고종도 도망간 것 아닙니까?

 

누구한테 맡겼습니까?

 

크롱

안 맡겼는데요?

 

블루이

안 맞기고 그냥 도망갔네요? 심지어 남의 나라 대사관으로?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크롱

솔직히 예전보다 더 위험했습니다. 

 

블루이

그럼 도망가도 됩니까?

 

크롱

도망간 게 아니라 실제로 피란을 간 거죠. 선조는 그냥 도망을 갔고요. 

 

(피난이나 도망이나!!)

(하하하)

 

솔 

저는 나라는 냅눴습니다.

 

테디 

도망은 갔죠. 하지만 다른 나라로 간 것은 아니죠.

 

블루이

아니죠, 다른 나라로 간 거죠. 한국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은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다른 나라죠. 거기에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거죠. 실제로 러시아를 간 것과 동일합니다. 당시의 관례를 봐도 그렇고요.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것을 보면, 일본이 러시아 공사관을 공격을 못 하기 때문이죠. 지금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모든 나라의 대사관도 그렇고요. 그런데 조선의 국부인 왕이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것은 잘한 것입니까?

 

크롱

도망은 아니라, 피난! 

 

블루이

도망이 아니라 피난을 갔다고 칩시다. 그럼 잘한 것입니까?

 

크롱

잘한 일은 아니지만... 못 했 던... 

제가 이 사람을 대변해야 하는 것이 참 화가 납니다. 

 

 

batch_IMG_2359.jpg

 

 

블루이

테디, 방어찬스를 쓰겠습니다.

 

테디

일단 아관파천 직전에 궁내에서 일본인이 난장판을 쳤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명성황후 시해도 있었고요. 옥체를 보전하는 데 위협이 되는 요소들이 점점 생겼습니다. 일본인들이 언제 들어와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암살을 할 수도 있고요. 그 상황에서 일본을 견제하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봐요.

 

 

'고종과 커피'

 

블루이

제가 또 질문할게요. 커피 좋아하십니까?

 

크롱

네.

 

블루이

왜 커피를 좋아하십니까? 어떻게 커피를 접하셨습니까?

 

크롱

일본이 가져다줬습니다. 

 

블루이

왜요?

 

크롱

글쎄요.

 

블루이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고요. 고종이 커피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죠.

 

 

'나라가 빼앗기는 동안 고종은 무엇을 했나요?'

 

벤자민

궁금한 거 하나! 을사늑약 이전에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있었어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뒤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다음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갈 때까지 고종은 왕으로서 뭘 했어요? 그냥 꼭두각시 아닌가요?

 

크롱

10년 정도 청이 주도권을 잡고, 일본, 유럽, 미국이 기웃거리는 공백 상태가 됐대요. 그래서 제중원 등에 근대식 병원과 전선, 전기 등을 들여오고요. 그 뒤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문에 대혼란이 있었는데, 그래서 고종이 불안했어요.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권력을 뺐었잖아요. 자신의 왕권유지를 기본전제로 깔았어요. 서양문물에 대해서 마구잡이로 들여오고, 무기와 군함도 들여오는 등의 일을 했다고 합니다.

 

벤자민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뒤에는 도망갈 때까지, 전기를 들여왔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는 건가요?

 

크롱

솔직히 저는 상황만 그랬지, 고종이 직접 한 일은 딱히 없습니다. 

 

블루이

사실상 고종이 한 일이죠. 직접 했다기보단, 그 시대에 있었던 일은 고종이 한 일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해야 하는 거죠.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벤자민

저는 여기서 왕의 약한 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들이 전쟁을 하는 동안 막지 못하고, 결국 나라를 뺏기는 계기가 되었고요. 약한 왕의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블루이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크롱

동의하진 않지만, 동의해야겠습니다.

 

'천주교 탄압'

 

마리모

근데, 대원군은 고종 3년에 천주교를 탄압해서 4000여 명을 학살했다고 하는데요. 

 

블루이

흥선대원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하?

 

크롱

그는 제 아버지이고요. 평민처럼 살다가 대왕대비와 손을 잡고 아들을 왕으로 올렸어요. 그런데 고종이 어리니까 대원군이 섭정을 했는데, 그는 개혁적이고 백성들이 살기 편해지는 정치를 했는데요. 고종이 성인이 된 후에도 권세를 이어간 것은 분명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리모

혹시 학살한 이유를 아세요?

 

블루이

그건 흥선대원군이 한 거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고종에게 물어볼 순 없죠.

 

테디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마리모

아빠?

 

블루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는 아니고요. 마리모와 마리모 아버지처럼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사이가 나쁜 부자지간이라고 보면 되겠죠.

 

명성황후가 죽게 된 게 흥선대원군 때문이라는 논리적인 설이 많아요. 흥선대원군이랑 명성황후는 사이가 많이 안 좋았대요. 흥선대원군이 직접 일본군에게 가서 명성황후를 죽이라고 직접 말한 적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명성황후가 죽었잖아요. 그때 고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요?

 

크롱

솔직히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처음 듣고요.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쇄국 정치를 했잖아요. 그런데 일본이 득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왜 도와줬는지도 모르겠고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블루이

질문은 고종은 무얼 했나요? 입니다. 

 

크롱

아하! 고종은 뭘했냐! 

 

(잤습니까?)

(숨을 쉬었겠지)

(커피를 마셨을 수도...)

 

'고종과 김구의 인연'

 

블루이

우리 얼마 전에 무슨 영화를 봤는데? 

 

레몬

대장 김창수!

 

블루이

거기에 잠시 고종이 나오죠? 고종이 뭘 했습니까?

 

크롱

김구를 구했습니다!

 

블루이

김구를 석방했죠? 그 훌륭한 업적을 이야기하셔야죠! 역사적 사실로는 김창수를 석방했죠.

 

테디

그것은 아닙니다. 김창수가 사형선고를 받은 다음에 집행일 하루 전에 고종이 사형집행정지를 시켰습니다. 그 후에 김창수는 탈옥을 하죠. 사형집행정지를 시킨 것은 영화에 나오듯 ‘이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라고 하는 고종이고요. 

 

<정리발언>

제가 고종을 하는 동안 장점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렇게 성군이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요. 제가 예상한 질문이 안 나와서 속상하네요. 

 

일동

어떤 질문이요? 이야기해주세요!!

 

고종이 왜 왕위에 집착하냐, 비자금, 멸망을 재촉했다는 이야기도 나올 줄 알았고, 개화를 왜 이렇게 늦게 했냐는 질문도 있을 것 같았어요. 조선왕조 500년 사상 가장 유례없는 시대를 살았고,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린 끝에 왕위에 올라서 살기 힘들었어요. 고종도 힘들었어요. 이상입니다. 

 

 


 

 

 여덟 분의 왕을 모시고 조선 500년을 돌아봤습니다.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지난 세미나 때도 말했듯, 정보를 많이 아는 것보다, 그 정보를 취합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내 왕이 최고야' 세미나를 하면서 내 왕을 변호하고, 다른 왕을 비판하는 논리를 쌓으면서 훈련을 한 것이죠. 역사를 미래를 바라보는 창으로 쓰려면 필요한 능력입니다. 또, 같은 사건을 두고서도 시각과 태도에 따라서 얼마나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사란 무엇일까요? 사실 평생 고민할 가치가 있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그 중압감에 주저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종종 역사 세미나의 경험이 떠올리면서 오늘날 필요한 삶의 지혜를 역사에서 한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조금씩 아쉽겠지만, 다들 열심히 준비했기에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충분히'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역사 세미나를 통해서 우리는 한없이 넓고 깊은 역사라는 바다에서 또 다른 한 걸음을 걸었습니다.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batch_IMG_2422.jpg

 

 

자, 그럼 가장 기대되는 투표의 시간!

 이번에도 투표로 최고의 왕과 참가자를 뽑았습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batch_IMG_2414.jpg

 

 

최고의 왕으로는 태종이 뽑혔고,

제일 잘한 사람으로 솔과 벤자민, 제이크가 뽑혔습니다.^^ (추카추카)

(헉, 그런데 이번에는 상품 있다는 이야기를 안 했는데?^^)

 

...

 

 

참, 다음 역사 세미나도 공지합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언제, 어디가 될지는 모릅니다.^^

팔만대장경에 버금가는 긴 글, 이만 줄입니다. 피쓰!